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파블로 네루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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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아야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울어본 적이 있다. 무언가가 끔찍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러다 못 참겠다 싶을 때 울게 되고는 하는데, 사아야는 자신이 끔찍하다고 생각해서 울었다. 사아야는 우는 와중에도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멋쩍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울음이 좀 멎을 것도 같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아야는 손에 든 잡지의 무게감을 느꼈고 그 잡지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울었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찬 수건으로 누르며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병가를 냈다. 회사를 다닌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낸 병가였다. 상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빨갛게 부은 눈에 수건을 눌렀다 뗐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수건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눈의 따가움이 줄어들었다 느껴졌을 때, 사아야는 침대로 돌아가려다 말고 용기를 냈다. 책상에 있는 잡지를 집어든 것이다. 잡지 표지에 실린,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도 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와서 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생각 하는 자신이 끔찍하다 느껴져 울음이 터졌던 것이다. 사아야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사아야는 잡지를 버리려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수정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사아야는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의 목록에서 리미의 이름을 찾아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살짝 당황한 목소리-그렇지만 기뻐서 톤이 올라간 것도 느껴지는-가 사아야를 반겼다.
“저기, 리미.”
“앗, 사아야. 잘 지내? 어쩐 일이야?”
사아야는 여기서 잠시 멈췄다. 어제 울었던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이 끔찍하다 생각하며 터트린 자기연민의 울음 같기도 하고, 이제 와서 그녀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사아야는 잡지 표지의 여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떠올렸다. 심지어 그 페이지가 몇 페이지인지까지 떠올렸고, 결심을 굳혔다.
“오타에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
오타에의 전화번호를 받기는 했지만 사아야는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연락을 받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오타에가 연락을 받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보통은 바쁘거나 매니저가 전화 받거나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계속 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래서 전화를 하지 못했다. 대신 리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최근에 오타에를 만난 적 있냐 물었고, 리미는 대답 대신 이번 주말에 오타에의 콘서트가 열리는데 거기 한 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리미는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를 간간히 내비쳤다. 사아야는 리미의 그런 점이 상냥해서 좋았고, 고맙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자, 잘 모르겠지만 힘내.”
“응, 그럴게. 고마워, 리미링.”
리미링, 이라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아야는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리미링이라는 말을 해본 게 얼마만인지 같은 생각을 했다. 다음에 다른 포피파 멤버들도 만나야겠다, 는 작은 다짐을 하며 휴대폰으로 콘서트에 대해 검색했다.
‘하나조노 타에 WINTER CONCERT’
일본 전역이라니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해도 일정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왔다 갔다 하는 콘서트 일정이라면 어쩐지 소속사 보다는 오타에가 제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곳곳을 이동하는 건 소속사에 이득이 안 되는 일일수도 있고. 심지어 표 값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기행을 하는 오타에라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 덕에 오타에의 콘서트 인기는 한층 더 높은 것 같았다.
사아야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연도 보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 너무 먼 곳은 안 되고 이번 주말에 한다는 콘서트도 사아야의 집 근처였는데 그 공연은 이미 볼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암표를 사면서까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아야의 목적은 어찌됐건 오타에를 만나기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전화했을 때 리미는 오타에는 거의 매니저랑 같이 다니지 않아서 공연 대기실로 가면 그냥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줬다. 몇 번 오타에의 콘서트에 갔었다는 리미는 오타에가 무료로 공연을 보여줬다고 했다. 객석 맨 앞자리에 앉혀준 뒤, 관객들에게 리미를 소개하기까지 했다고.
‘포피파의 멤버라고, 정말 좋아하는 밴드고 친구라고 소개 시켜줬어. 조금 놀라고 부끄럽기는 했는데 엄청나게 기뻤어.’
사아야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포피파를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나러 가면 오타에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아직도 나를 포피파의 멤버로 생각해줄까, 그런 생각들이 사아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사아야는 그럴 때마다 인터뷰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아야는 대기실에 찾아가 1대 1로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대기실에 누가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겠지만 적어도 대기실이라면 1대 1로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아야는 주말을 기다렸다. 주말이 되면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정리했다. 완벽한 문장이 되고 그게 한 문단 정도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완벽히 외울 때까지.
*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사아야는 대기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꽃다발을 주려는 사람들 틈새로 재빠르게 지나갔다. 경비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대기실 문 앞에 선 채, 사아야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시작은 고등학교 삼학년 말 무렵의 일이었다.
사아야는 해가 질 무렵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졌다. 혼자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같이 가려고 한 건지 청소가 끝날 무렵 오타에가 교실로 들어왔다. 청소를 하고 정리하는 사아야를 가만히 쳐다보던 오타에는 그날따라 말도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오타에가 갑자기 말을 건넸다.
‘사아야, 좋아해.’
그 때 사아야는 도망쳤다.
가방을 빠르게 챙겨들고 교실을 벗어나 뛰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 사아야는 당시에 뛰면서도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 정문까지 뛰어갔을 즈음에야 사아야는 자신을 쫓아오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자신을 부르는 오타에의 목소리도 없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아야는 두 번째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아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뛰어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찾지 못하고 잠이 들려는 순간, 뛰어가는 자신의 발소리 뒤로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타에도 그렇게 했다. 사과를 하거나 그 날에 대해 뭐라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아야는 포피파 활동을 할 때, 가끔씩 당황하거나 연주를 틀리는 정도의 문제를 겪었다. 몇 번 연습에 결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타에와는 필요할 때만 대화했다. 사아야는 자꾸만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오타에를, 교실에 혼자 남겨진 오타에를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워서 사아야는 밴드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모두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아야가 더 이상 오타에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포피파의 연습을 가는 것조차 괴롭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다들 대학교 생활로 생각보다 바빠졌고, 밴드 연습을 하는 시간은 고등학교 때보다 줄어들었다. 사아야는 이 때, 연습에 부러 더 많이 빠지기도 했다. 흐지부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포피파는 대학교 시절 해체했다. 사아야는 자신이 조금은 해체에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아야는 연습에 자주 나가지 않았고, 참여했을 때에도 몇 번은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라이브는 어떻게든 잘해냈지만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나태해졌다. 나태해졌다기 보다는 관심을 줄이고, 좀 더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아무튼 포피파는 해체했다.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시 함께, 같은 조건을 카스미가 붙였지만 사아야는 그 때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과의 밴드가 해체되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 또한 사아야의 마음속에 죄책감으로 남았다. 사아야는 점점 멤버들을 만나는 횟수도 줄여갔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말없이 모든 것에서 멀어졌고 떠났다. 가끔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흐릿하게 말했다. 심지어 오타에한테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오타에의 입장에서는 실종된 것일까, 아니면 밴드 해체의 원흉이 사라져 기쁜 것일까. 사아야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정작 본인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생각들을.
오타에는 대놓고 말한 적 없지만 밴드 활동을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언젠가 오타에가 웃으며 했던 말을, 사아야는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서 내보낼 수 없었다.
‘계속 혼자서 기타를 쳐서 그런지 밴드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워.’
사아야는 대기실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그렇지만 시간을 오래 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연습했던 문장들을 머릿속에 되새긴 뒤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것은 오타에였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오타에를 보고 사아야는 당황해 아, 하는 소리만 냈다. 오타에 또한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서있었다. 이내 오타에는 사아야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났다. 사아야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며 오타에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 오타에. 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 말을 들은 오타에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잠갔다. 사아야 또한 얘기하는 도중 누가 들어오는 것은 싫었으므로 그 행동에 조금 진정되었다. 대기실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는데, 오타에는 아무 의자에나 앉은 뒤 맞은편에 놓인 의자와 사아야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아야는 잠시 망설이다 의자에 앉았다. 사아야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긴장이 되는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하하, 하고 실소했다. 그 옛날 오타에는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내게 고백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동시에 어떠한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오타에는 사아야가 말하기를 기다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과하러 왔어.”
“사과? 무슨?”
사아야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말했다. 그 날 자신이 도망친 것에 대한 미안함, 도망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자신, 은근하게 포피파 활동이 중단되도록 한 것, 그리고 왜 자신이 사과하러 왔는지에 대해서. 사아야가 본 잡지 인터뷰에서 기자는 오타에에게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잡지에는 한 줄로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던 시절
이라는 말만 적혀 있었고, 사아야는 그 말을 본 순간 오타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타에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빼앗아간 건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해서 내 맘만 편해지는, 그런 이기적인 선택 같기도 해서 고민했는데, 그래도 오타에에게 전부 다 말하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서. 포피파… 계속 열심히 했다면 지금까지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하니까.”
오타에는 무표정으로 사아야의 말을 들었다.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했다. 사아야는 숙인 채로 있던 고개를 들어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는 이제 오타에가 욕을 하든 자신을 용서하든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다. 사아야의 무릎과 그 위에 놓인 손이 덜덜 떨렸다.
“난, 사아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포피파를 자기가 해체 시켰다고 생각하다니. 난, 그냥,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 우리들 정말로 바빴으니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뭉치기로 했고, 그건 불만 없는걸. 난 의외로 지금 혼자서 노래하는 나 자신도 좋아하게 되었어.”
“그럼 왜 밴드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썼어? 오타에는 혼자서 기타 치는 것보다 밴드에서 기타 치는 걸 더 좋아했잖아.”
“사아야, 그 말 기억하고 있구나.”
오타에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돌아왔다. 오타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예전에 자주 봤던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웃는 오타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있지. 사실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너한테 고백했을 때야. 왜인지 알아?”
사아야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오타에가 그 날의 일을 꺼내면 뭐라고 해야 하나, 몇 번이고 대답을 상상했지만 대기실 문을 두드리던 순간까지도 마땅한 대답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사아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백을 안 하는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었어. 아니야, 울지마, 사아야. 밴드를 못하게 돼서가 아니야.”
오타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아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사아야가 얼굴을 양손으로 감추자, 그 손을 천천히 떼어낸 뒤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댔다. 사아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당분간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널 다시 못 보게 되니까 그랬어.”
사아야가 오타에의 눈을 쳐다봤다. 오타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아야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무릎을 떨었다.
“사아야, 내가 왜 전국에 콘서트를 열었다고 생각해? 혼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거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점 유명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왜일 거라고 생각해.”
사아야는 몸의 중심을 잠깐 잃었다. 의자가 순간 미끄러졌고, 사아야는 그대로 앞을 향해 주저앉았다. 오타에는 당황하지 않고 쓰러지는 사아야를 받아냈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를 안은 채였는데, 사아야는 오타에를 밀어낼까 하다 그만뒀다. 그대로 오타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타에의 어깨가 점점 축축해졌다.
“오늘 같은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 난 그냥 사아야,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난 아직도 너를 좋아해.”
사아야는 생각했다. 내가 연락도 하지 않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도망쳐있는 동안, 그 긴 시간 동안 오타에는 여전히 나를 좋아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교실에 혼자 남겨진 채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그 날 오타에는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교실 문을 닫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하…….”
사아야가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오타에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밴드가 없어진 것보다 밴드가 없어져서 사아야를 보지 못하게 된 사실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교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계속 해서 고백한 사실을 후회한 것이다. 도망친 건 난데, 계속 후회하면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는 말을 삼켰을 것이다. 사아야는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사아야의 몸이 앞으로 늘어졌다. 오타에의 가슴까지 얼굴이 떨어졌을 때, 사아야는 간신히 팔을 뻗어 오타에의 어깨를 잡았다. 오타에가 걱정이 되는지 사아야? 라고 작게 불렀다.
“끔찍해.”
“그, 사아야. 나는 네가 여태 그런 생각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미안.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아야가 고개를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보여줬던, 드럼에 집중할 때면 드러났던, 확신에 찬 표정이다. 든든하고 굳건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오타에는 오랜만에 본 사아야의 표정에 놀라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그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지.
“그럼, 사아야.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 때 왜 교실에서 뛰쳐나간 거야?”
끝까지 도망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오타에를 보며 사아야는 오타에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상냥한 사람인거야, 나 혼자 완전 비참하고 끔찍한 사람 같잖아. 사아야는 여태까지 자신도 제대로 대답 내리지 못한 질문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왜 그 때 도망쳤지. 사아야는 잠시 생각했고, 생각보다 아주 쉽게 답을 찾아냈다.
“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너무, 너무 갑작스럽고 무서웠거든. 밴드 일이 그렇게 된 것처럼 무서워서 도망쳐버렸어.”
“뭐가 무서웠는데?”
“난, 그, 하하… 이제 와서 이유를 알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아니.”
“내 집안은 나름 보수적이었고, 나 자신도 그 때 약간은 보수적인 아이였거든. 그런데 오타에 너는 정말 자유로워보여서… 네가 손해 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 짧은 순간에 너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았어. 오타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랑 함께 있는 미래를 그 때 상상했다는 건데…… 아니, 이제 와서 무슨. 그냥 차라리 화를 내줘.”
사아야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오타에, 그 때 나도 널 좋아했었어.”
오타에의 무릎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차갑다, 고 생각하며 오타에는 옛날 생각을 잠깐 했다.
“사아야, 너 예전에 연습할 때마다 과감하지 못하다거나 진입하는 부분이 느리다는 말을 들었잖아. 기억나?”
“그래, 그거 기억나. 카스미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웃었어. 아리사가 주로 화를 냈지. 난 겁도 많고 뭔가 한 박자 느린 편이니까.”
“사아야.”
“응?”
“난 그럼에도 끝내 맨 뒤에서 드럼을 쳐준 그 모습을 좋아했어.”
“지금도?”
“지금도 다시 여기까지 와줬잖아. 한 박자 느렸지만. 사아야, 내 공연들 티켓이 왜 싼지 알아? 혹시 네가 돈이 없거나 가난하게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했어.”
“정말?”
“정말이야. 진짜 웃기지. 아, 이제 안 우네.”
사아야는 웃음을 터트렸고, 웃음이 멎은 뒤에는 미소 지은 얼굴이 되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오타에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눌렀다.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양 손으로 오타에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조금은 당황했는지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사아야의 손가락이 오타에의 볼을 톡 건드리거나 가볍게 문질렀다.
“오타에, 오늘 바로 카스미한테 전화해서 밴드 얘기 해볼 거야.”
“정말?”
오타에가 눈에 띄게 기뻐하더니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아야는 그 얼굴을 보고 전화 정도는 잠깐 미뤄도 될 것 같다 생각했다. 아니,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시간 조금 내줄 수 있어?”
“응, 얼마든지. 무슨 일인데?”
사아야는 오늘만큼은 뒤도는 대신 한 발자국 전진하기로 했다. 사아야가 몸을 앞으로 움직였고, 오타에의 입술에 사아야의 입술이 닿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오타에가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사아야는 오늘 한 발자국 전진할 생각이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공연 관계자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대기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