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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3. 23:59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크리스마스. 12월이 와도 치사토는 이제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연예계는 12월만 되면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총결산, 새로운 작품 준비 등으로 바빴다. 아이돌이라는 생활이 추가되니 12월은 더욱 버겁기만 했다. 산타, 선물, 트리, 휴일 같은 단어는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치사토는 여유가 갖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상으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치사토는 웃으며 모든 스케줄을 차근차근 소화했다. 아주 차근차근, 이러다 보면 1월이 오고 신년이니 뭐니 하고 그러다 보면…

 

치사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비친 거울에는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있고, 오늘은 파스파레가 아닌 개인 스케줄이 있는 날이었다. 치사토는 이미 간단한 인터뷰 촬영을 마친 뒤였다. 대기실에 혼자 남아 시계를 보며 치사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삼십 분의 휴식 후 새로운 스케줄 준비를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었다.

 

“하아.”

 

한숨을 한 번 내뱉은 뒤, 기지개를 펴자 치사토의 어깨에서 으득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 날 쉬게 된다고 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치사토는 그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크리스마스, 예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어딘가에 놀러가기도 하고 장난감 같은 것을 사기도 했는데. 가족들은 각자의 일정이 있으므로 치사토가 쉬게 된다고 해도 어차피 혼자가 되고 만다. 좀 전의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는 다른 사람과 함께라는 이미지가 있는 점이 따뜻하고 좋아요, 라는 말을 했는데 정작 함께할 사람이 없다니. 치사토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러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잖아. 순간 똑똑하는 소리가 들려 치사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누구세요.”

“시라사기 치사토 씨 앞으로 배달 왔는데요.”

 

배달이 올 게 있던가. 아마 팬들이 보낸 화환 같은 거겠지. 이번 인터뷰는 나름 큰 곳에서 촬영한 거니까. 치사토는 목소리를 조금 키워 들어오세요, 라고 외쳤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배달을 온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였다. 나무…

 

“나무?”

 

치사토는 자기도 모르게 나무라고 외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난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나무가 먼저 보였다는 사실에 놀란 감정이 더 컸다. 나무가 움직이며 치사토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의 양 옆으로 사람의 손이 간신히 보였다. 치사토는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를 배달하러 온 배달원이 가엾게 느껴졌다.

 

“무거우실 텐데 아무 곳에나 내려주세요.”

“그럼 그러기로 할까, 공주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배달원에게 반문하고 싶어지려던 찰나 내려놓은 나무 뒤에서 나타난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치사토는 나무를 봤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카오루?”

“여어, 치사토. 오랜만이야. 요즈음 통 바빠서 볼 수가 없…….”

 

카오루는 치사토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가에는 늘 짓는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휘어진 눈과 입에서 보이는 상냥함은 여전했다.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네, 치사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오루를 똑바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너 같으면 안 놀라겠어? 집채만한 트리가 대기실로 배달 오더니, 그 뒤에서 나타난 게 너라고.”

“음, 확실히 그렇군.”

“대체 왜 네가 이런 걸 배달하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주는 거니까.”

“그래, 네가 나한테… 뭐?”

 

카오루는 여전히 웃고 있다. 치사토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치사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카오루의 얼굴을 본 시점부터 원래부터 있던 피곤이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

 

“아, 걱정하지 마.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있으니까. 그건 크리스마스 이브날 줄게.”

“아니, 그런 거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 왜 멋대로 이런 트리를 주는 거야. 애초에 나 몇 십분 뒤면 이 대기실에서 나가야 한다고. 그 때는 어쩔 건데.”

“내가 옮기거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카오루가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을 취했다. 치사토는 카오루를 한 대 때려야 하나 아니면 말로 때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기로 했다. 카오루의 머리카락과 스웨터에 붙은 트리의 잎들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으므로.

 

“잎 좀 떼고 말해, 카오쨩.”

“아, 이거 완전 나무가 되어버렸군. 잠깐, 생각해 보니 지금이라면 나무 역할에 이입할 수 있을지도.”

 

평소라면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나뭇잎이나 떼라고 했을 텐데, 치사토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카오루는 치사토의 큰 웃음소리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치사토를 따라 웃었다. 대기실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기려고 작정한 거야?”

“그럴 리가. 사람 하나 웃기려고 이렇게 큰 나무를 옮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럼 이건 뭔데.”

 

치사토가 트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잎이 흔들리고 가지의 작은 부분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의 산을 보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산. 아니, 트리가 너무 커서 어찌 보면 산을 가져온 것 같기도 했다.

 

“선물이지.”

“나무가?”

“음, 선물을 위한 선물이지.”

“제대로 설명…”

 

치사토는 설명, 이라고 말하다 자신이 카오루에게 지적하는 순간에도 웃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치사토는 말하던 것을 잠시 멈췄다. 카오루는 왜 그러냐 묻는 대신 치사토가 했던 것처럼 트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다시 한 번 이파리가 물결치며 흔들렸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선물 상자를 놔두려면 치사토의 집에 트리가 있어야겠지?”

“선물?”

“응, 선물. 그러니까 트리를 먼저 가져와봤어. 아, 그리고 치사토. 너도 나도 바쁘지만 그래도 며칠 뒤에 너희 집에서 보자고.”

“내 집에서? 왜?”

“왜냐니. 24일 날 함께 이 트리를 장식해야 하니까. 치쨩 그 날 집에 혼자잖아. 같이 트리 장식하자, 밤에. 피곤하다면 별 하나만 달아도 되니까.”

 

카오루가 미소 지으며 트리를 올려다봤다. 트리의 맨 꼭대기를 바라보는 카오루를 보며 치사토는 여유롭다 못해 자신의 마음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좀 전의 트리처럼 물결치듯 흔들리는 마음을 느꼈다. 카오루가 스웨터를 입어서인지 자신보다 키가 커서인지 오늘 따라 웃기긴 하지만 괜찮은 말을 자주 해서인지 몰라도, 오늘따라 카오루가 따뜻해 보였다. 치사토는 바쁜 와중에 머리카락에 초록색 잎을 꽂고 나타난 카오루를 보며 순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야?”

“응?”

“25일에 트리 밑에 선물을 놔둬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너도 피곤하고 그리고, 음, 그리고…”

 

카오루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치사토도 그런 카오루를 보며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나 싶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냥. 늦게까지 장식도 하는데 자고 가는 게 덜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서.”

 

치사토가 침을 삼켰다.

 

“그냥 해본 소리니까, 카오루.”

 

어색하게 미소 짓는 치사토를 보며 카오루는 말없이 자신의 스웨터에 붙은 잎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보풀과 함께 토독 하고 떨어져 나오는 잎을 나머지 손에 가지런히 모으다 말고 카오루는 고개를 들어 치사토를 내려다봤다.

 

“치사토가 잠들면 몰래 산타클로스처럼 선물 놔두고 가려 했는데. 계획이 물거품이네.”

 

치사토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카오루, 아직도 내가 그런 걸 믿을 것 같아?”

 

오랜만에 몸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치사토는 맘껏 웃었다. 한참을 웃다 말고 치사토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곧 매니저가 올 시간이었다. 트리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며 치사토는 카오루에게 향후 일정을 설명했다.

 

“그런가. 또 일이 있는 거였군. 그럼 이만 가봐야겠네.”

“트리는 놔두고 가. 내가 알아서 하지 뭐. 산타클로스라니… 카오루 연기 잘하니까 잘 어울릴지도.”

“흠, 그 말을 들으니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기대해도 되는 거야?”

“물론.”

 

대기실을 나서던 카오루가 문을 다시 닫고는 치사토에게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냐는 듯 치사토가 올려다보자, 카오루의 입술이 치사토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건 트리 밑에 놔둘 수가 없으니까.”

 

카오루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치사토는 뒤돌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치사토가 서 있었다. 치사토는 헛웃음을 지으며 거울을 유심히 쳐다봤다. 거울 속 치사토의 머리카락에 초록색 잎이 매달려 있었다.

posted by 리지드
2018. 11. 19. 22:36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야마부키 사아야는 그랬다. 뭔가를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아니, 늘 뭔가를 원하고는 있었다. 단지 사아야는 뭔가를 원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을 뿐이다. 사아야는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맞췄고, 그 삶이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자신의 이득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남들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썩 피곤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그랬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 언제부턴가 그 말이 사아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아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에 지쳤다.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아야, 도와줄 수 있어?’

 

이 말 한 마디면 사아야의 모든 것이 움직였다. 사아야는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연주를 하다가도 자주 멈췄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아야를 필요로 한다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아야는 늘 도와줄 수 있었다. 도와줄 수만 있었다.

그 날도 멤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며 사아야는 웃고 있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조금 피곤해 보여서 멤버들이 몇 마디 걱정을 던지기는 했다.

 

“아냐. 조금 잠을 못 자서.”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다. 사아야는 언제부턴가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집중력을 잃었다. 집안일에 가족 문제, 밴드, 학교, 성적, 인간관계, 같은 사람이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을 사야는 두 배로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느꼈다. 사아야는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집안 구석에 모여 있는 먼지 뭉치 같아.’

 

구르고 구르다 결국 구석까지 내몰린 먼지 뭉치. 쓸려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아야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아야는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그 날은 하교 후, 버스를 타고가 스튜디오에 도착하기로 했다. 연습이 있었다. 사아야는 연습 후, 빵가게 일을 도와줄 예정이었다. 사실 연습 날도 빵가게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로 옮긴 것이었다. 그런 것마저 스트레스였다. 멤버 모두가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벨을 누르고 뒷문에 모여섰다. 사아야는 맨 뒤에 서 있었다. 옆에는 오타에, 앞에는 나머지 멤버들이 있었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고, 멤버들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사아야는 오타에보다 살짝 앞에 서 있었는데, 내리려다 말고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사아야는 몸에 밴 습관을 버릴 수 없었다. 먼저 내리라는 의미로 사아야는 오타에의 이름을 불렀다.

 

“오타에.”

 

오타에는 버스에서 내리는 대신 사아야의 허리에 손을 감고 뒤로 살짝 끌어당겼다. 버스 기사는 그걸 내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대로 출발했다. 사아야가 당황해서 벨을 누르려 하는데, 오타에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오, 오타에? 왜 안 내렸어?”

 

사아야가 묻기 무섭게 오타에의 전화가 울렸다. 카스미였다. 카스미의 전화를 받은 오타에는 한 마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 카스미. 갑자기 일이 생겼어.”

 

사아야는 당황했다. 왜 내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버스가 계속 간다면 자신의 집과도 멀어지는 꼴이었다. 계속 가면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 생각하는데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아야를 쳐다봤다.

 

“사아야, 저 자리 어때?”

 

오타에는 사아야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2인석이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창가 자리에 앉힌 뒤, 그 옆에 앉았다. 사아야는 이 쯤 되니 당황을 넘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오타에가 원래 엉뚱한 말을 하고 가끔씩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는 건 알았지만 이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사아야는 하루 일정이 전부 꼬였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오타에,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당장 내려야해. 일단 이 버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내리고 싶었어?”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연습하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당연히 내렸어야지.”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사아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오타에도 사아야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올려다보면서 내 이름 불렀잖아.”

“그게 왜?”

“정말 내리고 싶었어?”

 

오타에가 사아야를 내려다봤다.

 

“오타에, 장난은 이쯤 하고 일단 내리자.”

 

다시 벨을 누르려 사아야가 손을 뻗었다. 오타에가 사아야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힘은 주지 않았지만 벨을 누르지는 못할 정도였다.

 

“난 사아야가 내리고 싶지 않아서 날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뭐?”

“내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걸.”

“그게 무슨…”

 

사아야는 화를 내려다 말고, 숨을 한 번 참았다. 몇 초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버스 안에서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사아야는 계속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참았다. 오타에의 행동과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아야는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는 이 상황이 싫었다. 카스미는 왜 오타에의 말 한 마디만 듣고 다시 전화도 하지 않는 걸까. 그 순간, 사아야는 휴대폰을 꺼냈다. 카스미에게 전화해보자는 생각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이 지연되는 게 아니니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아야.”

 

오타에가 사아야를 불렀다. 전화를 걸려다 말고, 사아야는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오타에는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사아야의 손은 여전히 휴대폰을 잡고 있었고,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휴대폰은 놔두고, 버스에서 잠깐 자는 게 어때?”

 

사아야는 이 쯤 되니 오타에가 생각이 없거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타에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기는 했지만 사람을 화나게 할만한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난이라기에는 집요해 보였다. 집요, 아니, 절실해보였다.

 

“오타에 원하는 게 있어? 원하는 게 그거야? 그렇지만 나 오늘은 아주 바쁘거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부탁 들어줘.”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부탁 들어주면 도와줄게.”

 

점점 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아야는 이제 한숨을 쉴 기운조차 없어 그냥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벨을 누르려 하면 오타에가 손을 뻗을 것이다. 사아야는 일단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오타에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무엇을 들어주겠다는 거야, 라고 물으려는데 오타에가 입을 열었다.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그러니까 도와줄게.”

 

사아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오타에의 말대로 잠이 오는 것도 같았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이 감기려 했고, 사아야는 이러다가는 정말로 부탁을 들어주게 되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 안에서 잠들면 큰일인데도 사아야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정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 근래 잠도 자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한순간 화낸 뒤, 긴장이 풀리자 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졸리는 와중에도 사아야는 말을 이어가려 애썼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사아야는 눈이 감기는 순간 오타에가 속삭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아야, 잘 자.”

 

*

 

사아야가 눈을 떴을 때는 종점이었다. 버스들이 몇 대 줄지어 선 터미널에서 내린 사아야는 이제 화가 나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잠을 자고 나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오타에는 이제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사아야가 종점까지 잠들 줄은 몰랐는데.”

 

저녁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사아야는 당황해서 눈을 피하는 오타에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그러기야?”

 

사아야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을 묻기 위해 안내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 오타에가 사아야의 어깨를 잡았다.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을 때처럼. 사아야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냐는 듯 오타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사아야는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오타에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사아야를 앉혔다.

 

“내가 물어보고 올게.”

 

사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타에가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잠에서 깨어나 뻑뻑한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눈이 건조하면서도 시렸다.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양 손으로 눌렀다. 몇 분 정도 그러고 난 뒤에야 오타에는 돌아왔다. 오타에의 손에는 따뜻한 캔 음료가 두 개 들려 있었다.

 

“깨죽?”

“맛있어 보여서.”

 

깨죽이 캔에 들어있으면 그건 음료일까 아닐까, 오타에는 그런 소리를 하며 따뜻한 캔을 사아야의 볼에 가져다댔다. 사아야는 자신 몫의 음료를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아야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캔을 양 손 안에 가둔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오타에는 옆에서 말없이 깨죽을 마시거나 후후 불어대거나 했다. 오 분 정도였을까, 사야는 그제야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삼십분 뒤에 온대.”

“응?”

“버스 말이야.”

“아, 응.”

“그거 타면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사아야는 적당히 식은 캔의 뚜껑을 땄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고소한 냄새가 캔 안에서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맛있네.”

“그렇지?”

 

오타에는 깨죽을 절반 이상 마신 상태였다. 사아야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깨죽을 마셨다. 평소라면 삼십분 이라는 시간 동안 시계를 보기도 하며 언제쯤 미리 나가 있어야 좋은지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차를 놓쳐도 다음 차가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빵집에는 내가 연락해뒀어.”

“뭐, 정말? 오타에, 너 생각보다 철저하구나.”

“지금은 칭찬해줘야 하는 타이밍 아냐?”

“하하, 그건 그러네.”

 

사아야가 웃는 소리가 터미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오타에,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버스에서 안 내린 거야. 아까는 조금 화가 나서 물어봤는데, 지금은 정말 화 안 났으니까.”

 

오타에가 사아야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잠들기 전 본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비슷하다 생각했다.

 

“사아야는 걱정이 너무 많아.”

“글쎄, 오타에가 걱정이 없는 게 아닐까.”

 

사아야는 그 말을 한 뒤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럽다는 의미야.”

“사아야는 내가 왜 걱정이 없는 것 같아?”

“응?”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 했다. 말없이 깨죽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거든. 그래서 걱정이 적은 거야.”

“그건 좋은 일이네.”

“사아야.”

“응?”

“사아야가 힘들 때는 누가 도와주는 거야?”

 

오타에는 다 마신 깨죽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왔다. 사아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가 버스에서 내 이름을 불렀잖아. 도와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 그것뿐이야.”

 

몇 십분 뒤에 버스가 도착했다. 사아야와 오타에는 2인석에 앉았다. 이번에도 사아야가 창가 자리, 오타에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사아야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오타에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잠깐 잘 테니까, 이번에는 꼭 제 때 깨워줘.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꼭.”

 

오타에의 어깨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오타에는 만족했고, 사아야도 그랬다. 버스가 출발하고, 사아야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사아야는 한 가지 말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사아야에게 있어서 부탁이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시간 비워놔. 그 때도 이렇게 도와줘.”

 

오타에는 대답하는 대신 사아야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좀 전까지 따뜻한 캔을 쥐고 있었던 손은 따뜻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바라보다 말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얀 색으로 변하면 더 예쁠 것 같았다. 시간은 언제든 비워놓을 수 있지. 오타에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아야, 좋은 꿈 꿔.”

posted by 리지드
2018. 10. 12. 16:49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파블로 네루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

 

언젠가 사아야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울어본 적이 있다. 무언가가 끔찍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러다 못 참겠다 싶을 때 울게 되고는 하는데, 사아야는 자신이 끔찍하다고 생각해서 울었다. 사아야는 우는 와중에도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멋쩍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울음이 좀 멎을 것도 같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아야는 손에 든 잡지의 무게감을 느꼈고 그 잡지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울었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찬 수건으로 누르며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병가를 냈다. 회사를 다닌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낸 병가였다. 상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빨갛게 부은 눈에 수건을 눌렀다 뗐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수건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눈의 따가움이 줄어들었다 느껴졌을 때, 사아야는 침대로 돌아가려다 말고 용기를 냈다. 책상에 있는 잡지를 집어든 것이다. 잡지 표지에 실린,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도 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와서 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생각 하는 자신이 끔찍하다 느껴져 울음이 터졌던 것이다. 사아야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사아야는 잡지를 버리려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수정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사아야는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의 목록에서 리미의 이름을 찾아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살짝 당황한 목소리-그렇지만 기뻐서 톤이 올라간 것도 느껴지는-가 사아야를 반겼다.

 

“저기, 리미.”

“앗, 사아야. 잘 지내? 어쩐 일이야?”

 

사아야는 여기서 잠시 멈췄다. 어제 울었던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이 끔찍하다 생각하며 터트린 자기연민의 울음 같기도 하고, 이제 와서 그녀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사아야는 잡지 표지의 여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떠올렸다. 심지어 그 페이지가 몇 페이지인지까지 떠올렸고, 결심을 굳혔다.

 

“오타에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

 

오타에의 전화번호를 받기는 했지만 사아야는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연락을 받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오타에가 연락을 받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보통은 바쁘거나 매니저가 전화 받거나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계속 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래서 전화를 하지 못했다. 대신 리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최근에 오타에를 만난 적 있냐 물었고, 리미는 대답 대신 이번 주말에 오타에의 콘서트가 열리는데 거기 한 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리미는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를 간간히 내비쳤다. 사아야는 리미의 그런 점이 상냥해서 좋았고, 고맙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자, 잘 모르겠지만 힘내.”

“응, 그럴게. 고마워, 리미링.”

 

리미링, 이라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아야는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리미링이라는 말을 해본 게 얼마만인지 같은 생각을 했다. 다음에 다른 포피파 멤버들도 만나야겠다, 는 작은 다짐을 하며 휴대폰으로 콘서트에 대해 검색했다.

 

‘하나조노 타에 WINTER CONCERT’

 

일본 전역이라니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해도 일정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왔다 갔다 하는 콘서트 일정이라면 어쩐지 소속사 보다는 오타에가 제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곳곳을 이동하는 건 소속사에 이득이 안 되는 일일수도 있고. 심지어 표 값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기행을 하는 오타에라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 덕에 오타에의 콘서트 인기는 한층 더 높은 것 같았다.

사아야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연도 보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 너무 먼 곳은 안 되고 이번 주말에 한다는 콘서트도 사아야의 집 근처였는데 그 공연은 이미 볼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암표를 사면서까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아야의 목적은 어찌됐건 오타에를 만나기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전화했을 때 리미는 오타에는 거의 매니저랑 같이 다니지 않아서 공연 대기실로 가면 그냥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줬다. 몇 번 오타에의 콘서트에 갔었다는 리미는 오타에가 무료로 공연을 보여줬다고 했다. 객석 맨 앞자리에 앉혀준 뒤, 관객들에게 리미를 소개하기까지 했다고.

 

‘포피파의 멤버라고, 정말 좋아하는 밴드고 친구라고 소개 시켜줬어. 조금 놀라고 부끄럽기는 했는데 엄청나게 기뻤어.’

 

사아야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포피파를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나러 가면 오타에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아직도 나를 포피파의 멤버로 생각해줄까, 그런 생각들이 사아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사아야는 그럴 때마다 인터뷰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아야는 대기실에 찾아가 1대 1로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대기실에 누가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겠지만 적어도 대기실이라면 1대 1로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아야는 주말을 기다렸다. 주말이 되면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정리했다. 완벽한 문장이 되고 그게 한 문단 정도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완벽히 외울 때까지.

 

*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사아야는 대기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꽃다발을 주려는 사람들 틈새로 재빠르게 지나갔다. 경비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대기실 문 앞에 선 채, 사아야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시작은 고등학교 삼학년 말 무렵의 일이었다.

사아야는 해가 질 무렵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졌다. 혼자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같이 가려고 한 건지 청소가 끝날 무렵 오타에가 교실로 들어왔다. 청소를 하고 정리하는 사아야를 가만히 쳐다보던 오타에는 그날따라 말도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오타에가 갑자기 말을 건넸다.

 

‘사아야, 좋아해.’

 

그 때 사아야는 도망쳤다.

가방을 빠르게 챙겨들고 교실을 벗어나 뛰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 사아야는 당시에 뛰면서도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 정문까지 뛰어갔을 즈음에야 사아야는 자신을 쫓아오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자신을 부르는 오타에의 목소리도 없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아야는 두 번째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아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뛰어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찾지 못하고 잠이 들려는 순간, 뛰어가는 자신의 발소리 뒤로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타에도 그렇게 했다. 사과를 하거나 그 날에 대해 뭐라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아야는 포피파 활동을 할 때, 가끔씩 당황하거나 연주를 틀리는 정도의 문제를 겪었다. 몇 번 연습에 결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타에와는 필요할 때만 대화했다. 사아야는 자꾸만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오타에를, 교실에 혼자 남겨진 오타에를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워서 사아야는 밴드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모두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아야가 더 이상 오타에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포피파의 연습을 가는 것조차 괴롭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다들 대학교 생활로 생각보다 바빠졌고, 밴드 연습을 하는 시간은 고등학교 때보다 줄어들었다. 사아야는 이 때, 연습에 부러 더 많이 빠지기도 했다. 흐지부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포피파는 대학교 시절 해체했다. 사아야는 자신이 조금은 해체에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아야는 연습에 자주 나가지 않았고, 참여했을 때에도 몇 번은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라이브는 어떻게든 잘해냈지만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나태해졌다. 나태해졌다기 보다는 관심을 줄이고, 좀 더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아무튼 포피파는 해체했다.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시 함께, 같은 조건을 카스미가 붙였지만 사아야는 그 때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과의 밴드가 해체되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 또한 사아야의 마음속에 죄책감으로 남았다. 사아야는 점점 멤버들을 만나는 횟수도 줄여갔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말없이 모든 것에서 멀어졌고 떠났다. 가끔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흐릿하게 말했다. 심지어 오타에한테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오타에의 입장에서는 실종된 것일까, 아니면 밴드 해체의 원흉이 사라져 기쁜 것일까. 사아야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정작 본인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생각들을.

오타에는 대놓고 말한 적 없지만 밴드 활동을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언젠가 오타에가 웃으며 했던 말을, 사아야는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서 내보낼 수 없었다.

 

‘계속 혼자서 기타를 쳐서 그런지 밴드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워.’

 

사아야는 대기실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그렇지만 시간을 오래 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연습했던 문장들을 머릿속에 되새긴 뒤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것은 오타에였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오타에를 보고 사아야는 당황해 아, 하는 소리만 냈다. 오타에 또한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서있었다. 이내 오타에는 사아야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났다. 사아야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며 오타에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 오타에. 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 말을 들은 오타에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잠갔다. 사아야 또한 얘기하는 도중 누가 들어오는 것은 싫었으므로 그 행동에 조금 진정되었다. 대기실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는데, 오타에는 아무 의자에나 앉은 뒤 맞은편에 놓인 의자와 사아야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아야는 잠시 망설이다 의자에 앉았다. 사아야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긴장이 되는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하하, 하고 실소했다. 그 옛날 오타에는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내게 고백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동시에 어떠한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오타에는 사아야가 말하기를 기다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과하러 왔어.”

“사과? 무슨?”

 

사아야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말했다. 그 날 자신이 도망친 것에 대한 미안함, 도망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자신, 은근하게 포피파 활동이 중단되도록 한 것, 그리고 왜 자신이 사과하러 왔는지에 대해서. 사아야가 본 잡지 인터뷰에서 기자는 오타에에게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잡지에는 한 줄로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던 시절

 

이라는 말만 적혀 있었고, 사아야는 그 말을 본 순간 오타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타에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빼앗아간 건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해서 내 맘만 편해지는, 그런 이기적인 선택 같기도 해서 고민했는데, 그래도 오타에에게 전부 다 말하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서. 포피파… 계속 열심히 했다면 지금까지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하니까.”

 

오타에는 무표정으로 사아야의 말을 들었다.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했다. 사아야는 숙인 채로 있던 고개를 들어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는 이제 오타에가 욕을 하든 자신을 용서하든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다. 사아야의 무릎과 그 위에 놓인 손이 덜덜 떨렸다.

 

“난, 사아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포피파를 자기가 해체 시켰다고 생각하다니. 난, 그냥,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 우리들 정말로 바빴으니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뭉치기로 했고, 그건 불만 없는걸. 난 의외로 지금 혼자서 노래하는 나 자신도 좋아하게 되었어.”

“그럼 왜 밴드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썼어? 오타에는 혼자서 기타 치는 것보다 밴드에서 기타 치는 걸 더 좋아했잖아.”

“사아야, 그 말 기억하고 있구나.”

 

오타에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돌아왔다. 오타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예전에 자주 봤던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웃는 오타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있지. 사실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너한테 고백했을 때야. 왜인지 알아?”

 

사아야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오타에가 그 날의 일을 꺼내면 뭐라고 해야 하나, 몇 번이고 대답을 상상했지만 대기실 문을 두드리던 순간까지도 마땅한 대답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사아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백을 안 하는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었어. 아니야, 울지마, 사아야. 밴드를 못하게 돼서가 아니야.”

 

오타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아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사아야가 얼굴을 양손으로 감추자, 그 손을 천천히 떼어낸 뒤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댔다. 사아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당분간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널 다시 못 보게 되니까 그랬어.”

 

사아야가 오타에의 눈을 쳐다봤다. 오타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아야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무릎을 떨었다.

 

“사아야, 내가 왜 전국에 콘서트를 열었다고 생각해? 혼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거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점 유명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왜일 거라고 생각해.”

 

사아야는 몸의 중심을 잠깐 잃었다. 의자가 순간 미끄러졌고, 사아야는 그대로 앞을 향해 주저앉았다. 오타에는 당황하지 않고 쓰러지는 사아야를 받아냈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를 안은 채였는데, 사아야는 오타에를 밀어낼까 하다 그만뒀다. 그대로 오타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타에의 어깨가 점점 축축해졌다.

 

“오늘 같은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 난 그냥 사아야,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난 아직도 너를 좋아해.”

 

사아야는 생각했다. 내가 연락도 하지 않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도망쳐있는 동안, 그 긴 시간 동안 오타에는 여전히 나를 좋아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교실에 혼자 남겨진 채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그 날 오타에는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교실 문을 닫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하…….”

 

사아야가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오타에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밴드가 없어진 것보다 밴드가 없어져서 사아야를 보지 못하게 된 사실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교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계속 해서 고백한 사실을 후회한 것이다. 도망친 건 난데, 계속 후회하면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는 말을 삼켰을 것이다. 사아야는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사아야의 몸이 앞으로 늘어졌다. 오타에의 가슴까지 얼굴이 떨어졌을 때, 사아야는 간신히 팔을 뻗어 오타에의 어깨를 잡았다. 오타에가 걱정이 되는지 사아야? 라고 작게 불렀다.

 

“끔찍해.”

“그, 사아야. 나는 네가 여태 그런 생각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미안.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아야가 고개를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보여줬던, 드럼에 집중할 때면 드러났던, 확신에 찬 표정이다. 든든하고 굳건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오타에는 오랜만에 본 사아야의 표정에 놀라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그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지.

 

“그럼, 사아야.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 때 왜 교실에서 뛰쳐나간 거야?”

 

끝까지 도망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오타에를 보며 사아야는 오타에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상냥한 사람인거야, 나 혼자 완전 비참하고 끔찍한 사람 같잖아. 사아야는 여태까지 자신도 제대로 대답 내리지 못한 질문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왜 그 때 도망쳤지. 사아야는 잠시 생각했고, 생각보다 아주 쉽게 답을 찾아냈다.

 

“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너무, 너무 갑작스럽고 무서웠거든. 밴드 일이 그렇게 된 것처럼 무서워서 도망쳐버렸어.”

“뭐가 무서웠는데?”

“난, 그, 하하… 이제 와서 이유를 알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아니.”

“내 집안은 나름 보수적이었고, 나 자신도 그 때 약간은 보수적인 아이였거든. 그런데 오타에 너는 정말 자유로워보여서… 네가 손해 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 짧은 순간에 너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았어. 오타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랑 함께 있는 미래를 그 때 상상했다는 건데…… 아니, 이제 와서 무슨. 그냥 차라리 화를 내줘.”

 

사아야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오타에, 그 때 나도 널 좋아했었어.”

 

오타에의 무릎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차갑다, 고 생각하며 오타에는 옛날 생각을 잠깐 했다.

 

“사아야, 너 예전에 연습할 때마다 과감하지 못하다거나 진입하는 부분이 느리다는 말을 들었잖아. 기억나?”

“그래, 그거 기억나. 카스미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웃었어. 아리사가 주로 화를 냈지. 난 겁도 많고 뭔가 한 박자 느린 편이니까.”

“사아야.”

“응?”

“난 그럼에도 끝내 맨 뒤에서 드럼을 쳐준 그 모습을 좋아했어.”

“지금도?”

“지금도 다시 여기까지 와줬잖아. 한 박자 느렸지만. 사아야, 내 공연들 티켓이 왜 싼지 알아? 혹시 네가 돈이 없거나 가난하게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했어.”

“정말?”

“정말이야. 진짜 웃기지. 아, 이제 안 우네.”

 

사아야는 웃음을 터트렸고, 웃음이 멎은 뒤에는 미소 지은 얼굴이 되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오타에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눌렀다.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양 손으로 오타에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조금은 당황했는지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사아야의 손가락이 오타에의 볼을 톡 건드리거나 가볍게 문질렀다.

 

“오타에, 오늘 바로 카스미한테 전화해서 밴드 얘기 해볼 거야.”

“정말?”

 

오타에가 눈에 띄게 기뻐하더니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아야는 그 얼굴을 보고 전화 정도는 잠깐 미뤄도 될 것 같다 생각했다. 아니,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시간 조금 내줄 수 있어?”

“응, 얼마든지. 무슨 일인데?”

 

사아야는 오늘만큼은 뒤도는 대신 한 발자국 전진하기로 했다. 사아야가 몸을 앞으로 움직였고, 오타에의 입술에 사아야의 입술이 닿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오타에가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사아야는 오늘 한 발자국 전진할 생각이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공연 관계자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대기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posted by 리지드
2018. 10. 2. 03:58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퐁당퐁당보다는 풍덩풍덩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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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토는 처음에 별 생각이 없었다. 카논이 큰일 났다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카논이 호들갑을 떠는 건 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뒤에 카논이 카오루가 여행을 갔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했을 때는 여전히 이상한 아이네, 하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카논이 큰 소리로 자전거 하나만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외쳤을 때는 미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사라졌다고…”

“하로하피 멤버 모두가 있는 채팅방에 잠시 여행 다녀올게, 라는 말만 남겨놓고 사라졌는데 그런데 사라져서…”

 

횡설수설하는 카논 옆에서 미사키가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웃었다기보다는 할 말도 없고 지을 표정도 없으니 웃어보았다는 것에 가깝다.

 

“그게 저도 어이가 없는데요. 카오루 씨 부모님이 와서는 자전거만 가지고 나가더니 안 돌아오는데 어디 갔는지 아냐고 물어서… 채팅방 보여드렸더니 그냥 납득하면서 가버리셨어요.”

 

미사키는 한 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그 집 부모님도 딸을 닮아서 정말 이상하다, 는 뜻이 담겨 있었다.

 

“카오루가 가끔씩 이상 행동을 보인 적이 많아서 익숙하신 것 같아. 갑자기 학교의 왕자님이 되었는데도 신경 안 쓰더라고. 그냥 그런 분들이셔.”

“치사토 쨩, 어쩌면 좋지! 자전거만 가지고 나간 지 벌써 삼일이 지났는데 어디서 쓰러져있거나 위험한 사람에게 잡혀갔다면 어떡해. 돈은 가져간 걸까.”

“그보다 라이브 스케줄은 괜찮은 거야?”

“아, 한동안 별다른 예정은 없어요. 카오루 씨 이번에 신작 연극 한다고 바빠서 잠시 미뤄뒀거든요.”

 

그보다 카오루 씨 걱정은 별로 안 하시네요, 라는 말과 함께 미사키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치사토 쨩은 걱정되지 않아?”

“아니, 뭐. 카오루가 그랬다고 하니까 어쩐지 걱정이 안 되네. 예전에는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48시간 동안 잠 안 자기, 겨울에 얼음물로 한 달간 목욕하기, 방음시설 안에서 소리 지르는 발성 연습하기, 같은 행동들을 한 적이 있어서. 말했듯이 익숙하기도 하고.”

 

치사토의 말에 카논은 이제 좀 안심이 되었는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셨다. 홍차 밑에 가라앉아있던 조그만 잎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치사토는 카오루가 이번에 맡았다는 연극에 대해 생각했다. 늘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는 카오루니까, 아마도 이번 연극과 관련이 있겠지. 치사토는 마야가 해줬던 얘기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마야 쨩이… 음, 이번에 카오루가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여행객 이랬나 뭐랬나. 아마 그것 때문에 경험을 쌓는답시고 자전거만 가지고 떠났겠지 싶은데. 이 말도 안 되는 기행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런 이유겠네.”

“말씀하는 게 냉정하시네요.”

“뭐, 한두 번 짜증났던 게 아니니까.”

 

냉정한 게 아니라 짜증이 난 거구나, 미사키는 생각만 하며 굳이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어쩐지 본인이 짜증났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치사토의 표정은 짜증을 넘어 신경질로 넘어가는 중인 것 같으니까 그냥 생각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신 미사키는 이 말도 안 되는 기행이 빨리 끝나야 하로하피의 일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텐데, 왜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은 걸까, 스케줄은 어떻게 잡아야 하나, 같은 매니지먼트에 관련된 생각을 했다. 언제 돌아온다는 언급이 없었으므로 이후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확실히 문제가 될 테니까.

 

“빨리 오는 게 좋을 텐데요.”

“뭐, 늦을수록 위험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늦으면 코코로가 돈을 써서라도 찾을 것 같아서.”

 

미사키가 웃었다. 치사토는 지친 웃음소리와 일정 각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미사키의 입 꼬리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카논 또한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은 그게 가장 큰일이네, 라고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코코로… 라고 한 번 중얼거린 뒤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물론 미사키 쪽에서 더 큰 소리로 났다.

 

“뭐 아무튼 두 사람 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봤을 때,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야. 왕복하는 거니까 돌아오는 시간 때문에 늦는 것 같아. 앞으로 삼일 안에는 돌아올 거야, 살아있다면 말이지.”

“치, 치사토 쨩…….”

“잘 아는 분이 그렇게 말하는 거니까 일단 걱정하지 않으려고 해볼게요. 코코로한테도 그렇게 말해서 안심시켜야겠고. 카논 씨도 저랑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하구미랑 코코로한테 말하러 가야 하니까.”

“아, 그래. 그러는 게 좋겠네. 치사토 쨩은?”

“난 차가 남은 게 아까워서 조금 더 마시다 갈게.”

 

손을 흔들며 나가는 카논과 짧게 고개 숙이는 미사키를 보며 치사토 또한 손을 흔들었다. 카페를 나서며 미사키는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그런데 치사토 씨는 왜 짜증이 난걸까. 뭐, 카오루 씨가 조금 짜증나는 사람일 때가 있기는 하지만. 짜증이라기보다는 거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미사키는 조금 생각하다가 다시 그 생각을 묻어뒀다. 왜인지 깊게 생각하거나 캐내면 안 될 것 같고, 지금은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니까. 잠시 뒤 미사키는 그 의문에 대해 잊어버렸고, 다시는 떠올리지 않았다.

 

*

 

치사토는 확실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집에 오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재빠르게 올라간 그녀는 침대 위로 가방을 집어던졌다. 이성이 제어할 새도 없이 그녀의 입에서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 진짜 짜증나. 세타 카오루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

 

몇 번 더 비슷한 말을, 그리고 가끔씩 욕을 섞어 내뱉은 뒤에야 치사토는 의자에 앉았다. 카논이 당황했던 것처럼 치사토는 자신이 평소와는 상태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진정되지 않았고, 갈수록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치사토는 이 감정에 대해 잘 분석할 수 있었고, 원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원인이 싫었고 그 원인을 잘 아는 자신이 싫었다.

걱정이 되니까 짜증이 났다. 주기적으로 무모한 짓을 해대는, 마치 타이머가 있는 스위치처럼 딸깍 하고 켜지면 좀체 꺼지지 않는, 이 제정신이 아닌-치사토의 생각에 의하면-사람이 몹시 걱정 되었으므로 짜증이 났다. 할 때마다 이상한 짓을 하네, 정도면 모를까 꼭 위험을 수반하거나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들을 하니 그 모든 일을 옆에서 본 치사토는 미칠 지경이었다. 실제로 예전에 극중 인물의 마음-사막을 횡단하는 인물-을 알고 싶다며 보일러를 최대로 틀거나 온천탕에 가거나 하다 열사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바보일 거야.’

 

치사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치사토는 바보와 천재가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로 카오루가 가장 적합하다 생각했다. 다른 건 전부 잊고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천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집중, 이라는 스위치가 켜지면 카오루는 이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 그 스위치가 켜진 상태를 즐기고는 한다. 치사토는 노력에서 재미를 느끼는 카오루가 늘 신기했다. 천재들이란 그런 거겠지. 말도 안 되게 힘든 일들이 재미있게 느껴지고. 영원히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점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치사토는 앞뒤는 물론이고 코 바로 앞의 일까지 재지 않고 뛰어드는 카오루가 정말로 싫었다.

카오루의 스위치가 켜지면 치사토는 매번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 그 스위치가 꺼지고 카오루의 마음속 불이 꺼질 때까지, 카오루의 불꽃이 촛불 정도로 안정될 때까지, 늘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 거기에 걱정은 덤이며 짜증은 그 위에 얹어주는 보너스였다. 늘 이성적인 생각만 하는 치사토지만 가끔씩 카오루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아마 그래서 짜증이 배로 나는 거겠지. 늘 꺼지지 않는 카오루의 불꽃 옆에서 치사토는 행여나 자신의 불꽃이 꺼지지는 않을까 초가 짧지는 않은가 애지중지 살폈다. 가끔씩 초조했는데, 그런 치사토 옆에서 카오루는 늘 환하게 웃었다.

 

“치사토, 연기라는 건 정말 재미있어. 게다가 치사토, 너라는 공주님의 훌륭한 연기를 보는 건 더욱 재미있고.”

 

카오루가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내버려둔 채, 몰두하러 뛰쳐나가면 그 때부터 치사토는 그런 카오루의 뒤에 남아 대본을 읽었다. 잘될지 어쩔지 모르는 드라마의 대본을 손에 꼭 쥔 채, 한 문장 한 문장 읽었다. 이입과 몰입, 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대본을 넘길 때마다 치사토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카오루, 너는 이입과 몰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도 않을 텐데. 늘 그런 식으로 방이 다시금 환해지기를 기다리던 중, 치사토는 언제부턴가 한 가지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게 뭐였더라.”

 

치사토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사실은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치사토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답을 대충 구겨 어딘가에 처박아 버렸다. 소망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고 몇 번 중얼거렸다. 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리니 정말 뭐였는지 까먹은 것도 같았다. 그냥 카오루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네. 치사토는 가방 안에서 오디션용 대본을 꺼냈다. 손에 익은 무게에 늘 비슷한 역할, 조용하고 서늘한 종이의 감각. 늘 겪으면서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치사토는 연기에 집중했다. 집중, 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되뇌는 자신을 느끼면서.

 

*

 

자전거를 타고 자기 집 앞까지 돌아온 카오루는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인데도 집에 들어서기를 망설이던 카오루는 일단 문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았다. 카오루는 몇 미터를 걸어 자신의 옆집인 치사토의 집 앞에 섰다. 치사토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

 

좀 더 페달을 열심히 밟았어야 했던 걸까. 그렇지만 자아를 찾는 여행객의 역할이니까 페달을 너무 급하게 밟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는걸. 카오루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대로라면 카오루는 새로운 경험이나 모험을 시도한 뒤, 집으로 돌아가 경험에 대해 곱씹어보고 신체의 감각을 최대한 기억하려 애쓴 뒤 오랫동안 잠을 잤다. 열네 시간 넘게 잠을 자고 나면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고는 했다. 카오루는 늘 그런 패턴으로 움직였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카오루는 치사토의 집 앞에 선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카오루는 일단 사과하고 싶었다. 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실 사과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카오루가 늘 했던 것이다. 사과하지 않으면 치사토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서워지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평소라면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면 끝났을 것이고, 아무리 무모한 일을 해도 어딘가로 갑자기 떠난 적은 없었다. 첫 날에는 무일푼 여행의 기분을 느끼면서 그런대로 움직였는데, 돌아올 때는 페달을 더 빨리 밟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할 정도였다. 카오루는 자전거로 도로를 달리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하게 집중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스위치가 켜지면 바로 뛰어들어 주변이라고는 둘러보지 않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도 자전거를 타고 이틀이나 지나서야 떠올랐을 정도로 연기할 생각만 가득했다는 사실이 카오루의 귀를 더욱 빨갛게 만들었다. 부끄럽네, 카오루가 중얼거렸다. 치사토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카오루는 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가끔씩 치사토는 어둠 속에서 연기를 하거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니까. 카오루는 문을 열고 나오는 부모님께 실례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실례를 하면서까지 카오루는 치사토를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치사토의 방으로 걸어가며 카오루는 어떤 순간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치사토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건 도로를 달리다 어떤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였다.

 

“학생, 혼자서 여행하는 건 위험하니까 조심해.”

“알겠습니다. 아름다우신 분의 말씀 꼭 새겨듣도록 하죠.”

“혼자만의 시간도 좋지만 다음에는 친구랑 같이 여행해봐. 그게 훨씬 재밌을 때도 있으니까.”

 

그 때, 카오루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잠시 뒤를 돌아봤다. 아주머니에게 손인사를 하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결국 하지 못했다. 점점 멀어지는 아주머니를 보던 카오루는 다시 앞을 보며 혼자, 라고 중얼거렸다. 자전거를 꺼내 집을 떠날 때, 카오루는 점점 멀어지는 집을 보며 여행을 하는 인물이라면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풍경을 기억하려 애썼는데, 그 풍경을 다시 떠올려 보니 거기에는 치사토의 집도 있었다. 카오루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페달에 얹혀있던 발을 헛디뎠고 도로 위로 넘어졌다. 가볍게 넘어진 정도라 곧바로 일어나 자전거를 세웠지만 더 이상 도로를 달릴 수는 없었다. 카오루는 그 때, 돌아가자마자 치사토를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카오루는 치사토가 늘 혼자 남아서 무얼 했을까 생각했고, 그보다 대체 무슨 기분으로 혼자 있었을지 생각했다. 카오루는 치사토의 집이 점점 멀어지는 걸 견딜 수 없었고, 자전거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치사토.”

 

카오루가 치사토의 방문을 열었을 때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카오루는 방으로 들어선 뒤, 문을 닫았다. 카오루는 어둠 속에서 치사토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치사토, 라고 불렀을 때 눈에 띄게 당황하는 숨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집중할 수 있는 자신이 좋은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카오루는 조용히 침대로 걸어갔다. 카오루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치사토는 왜 카오루가 자신의 방에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니 짜증이 어떤 수준을 넘었으므로 멱살부터 잡고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습 공격하는 셈 치고 몸을 확 일으킬 생각을 하려는데 카오루가 때마침 입을 열었다.

 

“미안해.”

 

치사토는 냉철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카오루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에도 없이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고, 카오루는 잠깐 놀랐지만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치사토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미안해, 라고 말했다.

 

“뭐가 미안한데?”

 

카오루에게 우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치사토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대뜸 뭐가 미안한지부터 물었다.

 

“뭔가에 빠지게 되면 말이야. 그런 상태가 끝날 때 즈음에는 매번 같은 생각들을 했거든. 치-쨩에게 말해줘야겠다, 치-쨩에게 보여줘야겠다, 치-쨩에게 가야겠다, 같은.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 치-쨩은 늘 같은 자리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카오루의 말에 치사토는 마음을 들킨 것을 감추려 애쓰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돌아갔을 때, 치-쨩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말하고 보여줘야 하지. 나는 치-쨩이랑 함께 연기를 하는 게 좋아. 예전에도 말했지만 연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와 함께 하는 연기가 좋아. 난 늘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랬는데, 이번에는 제일 먼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러고 보니 늦은 시간인 것도 미안해.”

 

치사토는 카오루의 표정과 말에 집중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봤다. 뛰는 심장이 주체가 안 되었다.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얹어 손가락으로 피부를 문지르다 문득, 문득 마음속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며칠 전에 구겨뒀던 거겠지. 치사토는 산에 걸리기 시작하는 태양처럼 천천히 떠오르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일출을 볼 때의 기분이 들었다. 체온이 오르는 것 같은 느낌, 뭐든 잘될 것 같은 느낌, 원하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 속에서 치사토는 신년이라도 된 것처럼 소망을 빌었다.

 

“카오루가 내 걱정을 제일 먼저 해줬으면 좋겠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소망을 보며 치사토는 그것을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주워 담기에는 너무 늦었고, 흘러넘치는 것만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만큼 카오루가 내 걱정을 해줬으면 좋겠어.”

 

카오루가 치사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댄다. 카오루의 손가락이 치사토의 손등에 살짝 닿았을 때, 치사토는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치사토.”

 

치사토는 자신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몸 곳곳에 온기가 돌았다. 카오루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치사토의 어깨를 살짝 그러쥐었다.

 

“왜 매번 나를 기다렸어?”

 

카오루의 손은 서늘해서 바깥 날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깨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치사토는 종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서늘함을 느꼈다.

 

“나도 카오루와 함께 연기하는 게 좋아. 하지만 그것보다, 나는 그냥… 카오루가 훨씬 좋아.”

 

치사토는 서로의 체온이 섞여 어깨와 손이 알맞은 온도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치사토는 조용해진 카오루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카오루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집중하는 중이었고 몰두하는 중이었다. 몰두하는 얼굴을 보며 치사토는 처음으로 화가 나지 않았다. 카오루의 눈이 향하는 곳을 보며 치사토는 카오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치사토는 눈동자에 담겨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치사토가 뒤늦게 어서와, 라고 했을 때 카오루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 날 처음으로 치사토는 집중, 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으며 집중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posted by 리지드
2018. 9. 30. 01:23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리사 언니 말이야. 요새 대단하지 않아요?”

“이건 확실히 대단하네요.”

 

사요와 아코는 말없이 포장된 쿠키를 내려다봤다. 모두의 쿠키에는 평소보다 배로 노력이 들어가 있어 멤버마다 다른 종류의 쿠키가 포장되어 있다. 게다가 이제는 맛 또한 취미로 만들었다고 해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내일부터 쿠키 가게를 열어도…….”

 

린코가 쿠키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모두 린코의 말에 동의했다. 기합이 너무 들어간 거 아닌가, 얘기하던 중 유키나 앞에 놓인 쿠키 봉지를 보고 모두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유키나는 가만히 자신의 쿠키 봉지를 들며 입을 열었다.

 

“삼색 고양이네.”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다.

 

“줄무늬마다 맛이 다르다고.”

 

어느 샌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리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코가 놀라며 되물었다.

 

“세 가지 색깔 전부 맛이 달라?”

“응, 전부 달라. 참고로 아코한테 준 박쥐 모양 쿠키는 초코가 아니라 깨 맛이야. 처음 시도해봤어.”

“아, 진짜다. 고소하고 맛있어!”

 

아코가 쿠키를 씹으며 한껏 누그러지는 동안 사요는 쿠키 봉지들을 다시금 훑어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이 씨, 연습은 제대로 하고 계시는 거죠?”

“물론. 이것 봐.”

 

사요에게 내밀어진 악보는 온갖 필기로 가득했다. 얼핏 보니 대충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연습한 다음, 수정을 거듭해 고칠 점과 강조할 점을 적어놓았다. 사요는 머릿속으로 쿠키를 만드는 시간과 악보를 보며 연습할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해보았다. 더군다나 오늘도 리사는 타올이나 생수, 예비 악보 등 필요한 물건을 전부 가방에 챙겨왔다. 부활동이 힘들었다는 말을 했으니 부활동도 참석했으며 오늘도 액세서리는 신경 써서 했다. 저렇게 살려면 몸이 몇 개여야 하지.

 

“뭐,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상관은 없지만.”

 

사요는 아무리 열심히 연습하는 자신이어도 이건 좀 무리에 가까운 수준이 아닌가, 하고 생각 했다. 사요는 연습의 양을 늘리고 싶을 때면 다른 일들을 줄이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리사는 모든 면에서 양이 늘어나있는 상태였다. 저걸 어떻게 감당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사요의 머릿속을 채웠다.

 

“리사.”

“응, 유키나. 무슨 일이야.”

“왜 내 것만 쿠키 종류가 다섯 가지나 되는 거지?”

“그건 그냥 힘 좀 내봤어.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유키나는 고양이 모양의 쿠키를 하나 꺼내 씹었다. 오도독 소리가 몇 번 난 뒤, 유키나가 입을 열었다.

 

“리사, 시간 분배 잘 하고 있어?”

“물론이지. 연습도 다 해왔다고 아까 말했잖아. 사요도 악보 보고는 납득했는걸.”

 

유키나가 리사의 얼굴을 쳐다본다.

 

“정말로 시간 분배 잘 하고 있어?”

 

리사가 웃었다.

 

“그럼.”

 

유키나는 턱에 손을 괴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공지사항을 발표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한 번씩 둘러봤다.

 

“리사는 오늘부터 연습 시간을 한 시간 늘릴거야.”

“에? 리사 언니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리사는 다음 주에도 쿠키를 이 정도로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사요와 아코, 린코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늘 알기 쉽고 올바른 결정만 하는 리더인 유키나가 갑자기 터무니없는 두 가지 사항을 공지하자, 세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그렇지만 확신에 찬, 심지어 단호하기까지 한 유키나의 말투에 세 사람은 대꾸하기를 망설였다. 유키나가 생각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좋아.”

 

그리고 리사는 이 말도 안 되는 공지에 의문조차 표하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공지사항이 내려진 뒤로 일주일간 리사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해냈다. 늘어난 연습 시간도 지키고 쿠키도 똑같이 만들어왔다. 심지어 다른 것들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유키나는 아주 가끔씩 리사를 빤히 쳐다봤다. 리사는 그럴 때마다 내가 뭔가 부족한 점이 있냐 물었고, 유키나는 리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이 딱 되던 날, 리사는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몸살감기, 유키나는 그렇게 말했다.

 

“저기, 이쯤 되니까 정말로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무슨 일이지, 사요.”

“이렇게 쓰러질 때까지 연습을 더 시키고 쿠키도 그대로 많이 만들어오라고 한 건 대체 왜 그런 건가요. 이러면 로젤리아에 더 방해가 되는 거 아닌가요. 납득할만한 이유를 듣고 싶은데.”

 

사요의 옆에서 린코와 아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유키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고, 사요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정도였다. 유키나는 사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요의 생각은 아주 타당해. 일리가 있어.”

 

그리고 유키나는 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요와 린코, 아코는 그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납득했다. 유키나는 당분간은 각자의 연습에 치중해 개인의 스킬을 향상 시키고, 에너지도 좀 보충해서 돌아오라고 했다. 모두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유키나는 연습실을 나와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자신의 집 앞에서 방향을 틀어 리사의 집으로 갔다. 리사의 방에 들어가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리사가 유키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미안해, 유키나. 실망했지. 몸 관리도 노력의 부분인데.”

“물론 몸 관리도 노력의 부분이지. 그런데 리사.”

“응?”

“나도 정말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유키나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예전부터 리사는 뭐든지 성실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니 무리하려는 경향이 있어. 예전에 몇 번 충고했어. 기억나?”

“응, 미안해.”

“사과하라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했는데도 리사… 일주일 전에 쿠키 만들어왔을 때 사실 조금 화나서 그런 결정 내린 거야.”

“화났었어?”

“밀어붙일 수 없을 때까지 밀어붙이면 더 이상 무리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몸이 기억하게 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어느 정도 힘들면 리사가 그만둘 줄 알았거든. 아플 때까지 무리할 줄은 몰랐어. 미안해.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멤버들한테도 사과하고 왔어. 다들 어느 정도는 납득해줬어, 어느 정도지만. 사요는 한숨부터 쉬더라고.”

“하하…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리사는 리사 자신한테 좀 미안해할 필요가 있어. 너 자신에 대해 너무 혹독하게 다룬다고.”

 

유키나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리사는 유키나의 시선을 잠시 회피하다 이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걱정 끼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하는 건 괜찮아?”

“그건 괜찮아.”

“다신 이런 일 없게 할게.”

“그 말도 무리하는 걸로 들리는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침대에서 급하게 일어나려는 리사를 눕힌 뒤, 유키나는 가방에서 이온 음료가 든 페트병을 꺼냈다. 리사의 이마에서 떨어진 수건을 다시 올려놓은 뒤, 페트병의 뚜껑을 손으로 힘줘 돌렸다.

 

“리사, 로젤리아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뒤쳐진다는 생각 하지 않았으면 해.”

“그러도록 할게. 그렇지만 유키나도 그렇고 누구나 그렇잖아? 그런 생각 아주 쉽게 들잖아. 노력은 하겠지만 잘 될지 모르겠네.”

 

유키나가 페트병을 내밀자, 리사가 누운 채로 천천히 이온 음료를 마신다.

 

“리사는 나한테만큼은 일류야. 내가 늘 기억하는 리사의 모습이 등이라고 하면, 내가 뒤에서 쫓아가는 중이라고 하면, 그러면 이렇게 쓰러지는 일 없게 할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리사가 사래 들린 사람처럼 연거푸 기침을 한다. 이온 음료가 침대에 흐르자, 유키나는 당황하며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타월을 꺼냈다.

 

“아니, 괜찮아. 이 수건으로 일단 닦고 새 수건 이따 가져오면 되니까.”

 

리사가 자신의 이마 위에 있던 젖은 수건으로 침대에 흐른 음료를 닦는다. 음료를 닦던 리사가 갑자기 가방에 타월을 집어넣고 있던 유키나의 손을 잡았다. 뜨거워, 라고 말하려던 유키나는 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리사가 자신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본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대로 멈춰버린다. 리사는 지금 얼굴도 손도 빨갛다.

 

“유, 유키나.”

“무슨 일이야.”

“쿠키는 계속 만들면 안 될까.”

“모두에게 한 종류.”

“유키나에게만 고양이로 하고, 나머지는 같은 종류로…”

“안 돼.”

“그렇지만 나… 나한테도 유키나는 일류인걸. 쿠키, 무리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유키나가 리사의 손을 잡아 침대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걸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리사의 손이 이번에는 유키나의 양 어깨를 잡는다.

 

“나 정말로 좋아해. 유키나. 아니, 유키나한테 쿠키 만들어주는 거. 아니, 유키나도 좋아. 그리고 쿠키도…”

 

유키나가 리사의 손을 떼어내며 웃었다.

 

“리사, 지금 열이 너무 오른 것 같아. 나 이제 가볼 테니까, 잠을 좀 자는 게 좋겠는데.”

 

리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 유키나가 웃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침대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유키나는 방에서 나갈 준비를 하며 리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리사가 잘 가, 라고 하자 유키나가 다시 웃는다. 리사는 잠들기 위해 눈을 감는다. 열 때문에 어둠 속에서 머리만 울리는 느낌을 받으며 리사는 소리에 집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유키나가 리사에게 속삭인다.

 

“나도 정말로 좋아해. 리사가 쿠키 만들어주는 거.”

 

정말이냐고 대답하려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아 리사는 입만 살짝 연다. 잠이 들려는 리사의 귀에 대고 유키나가 뭔가 말한다. 꿈이 아니고 환청이 아니기를, 리사는 확실히 들었다고 믿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리사가 좋아. 그리고 쿠키도.”

posted by 리지드
2018. 9. 24. 03:34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그녀가 냉동실에서 투명한 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치아바타가 들어 있다. 올리브가 군데군데 박혀 있어 검은 색이 드문드문 보였다. 봉지의 매듭 사이로 손톱을 집어넣었다. 탁탁, 하고 비닐을 몇 번 건드리는 소리가 난 뒤 매듭이 풀렸다. 그녀는 치아바타 세 조각을 미리 가져온 접시에 올려 놓았다. 봉지를 다시 묶고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접시 위에는 치아바타 말고도 접시 반 정도 크기의 거대한 크로와상이 있었다. 야마부키 특제 거대 크로와상.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주방으로 접시를 가져가며 그녀는 치아바타의 이름이 뭐였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야마부키 스페셜 올리브 치아바타? 그녀는 실소를 터트렸다. 평범한 빵에 스페셜이나 특제, 슈퍼를 붙이는 게 그 집의 방식이다. 굉장히 신경 쓰이지만 생각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도마 위에 크로와상을 올리고 식칼을 꺼내 들었다. 식칼로 크로와상을 6등분 했다. 보통의 크로와상이라면 3등분에서 4등분 정도면 알맞은데, 이 크로와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가스 밸브를 돌린 뒤, 스위치를 꾹 누르고 돌려 불을 켰다. 불이 화르륵 올라오는 걸 확인한 뒤, 중불로 줄였다.

 

그 다음부터는 코로부터 밀려오는 행복을 느끼면 된다.

그녀는 살짝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치아바타와 크로와상을 얹었다. 빵의 잘린 단면이 구워지도록 놓았다. 크로와상은 버터가 많이 들어서 그런지 기름을 바르지 않고 구워도 겉면이 매끈하고 향기로웠다. 그리고 그 팬 위에 같이 치아바타를 굽는 게 좋았다. 버터 향이 살짝 묻은 고소한 치아바타. 두 빵의 향기를 맡고 있으면 이후의 시간이 기대되는 법이다.

 

그녀는 따뜻하고 진하게 끓인 커피에 각설탕 한 개를 넣고 저은 뒤, 식탁 위에 올렸다. 커피가 든 머그잔 옆에는 갓 구운 빵들이 올라간 접시를 두었다. 오른손으로는 따뜻한 빵을 들고, 왼손으로는 머그잔을 들었다. 오른손 한 번에 왼손 한 번이면 되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되었다.

 

빵을 먹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휴대폰을 열고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모카, 올 때 빵 많이 사와.

 

메시지를 보내고 잠시 뒤, 그녀는 아 소리를 냈다. 잠시 뒤 귀까지 빨개져 고개를 가슴께까지 수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네, 식습관까지 변해가잖아.”

 

그래도 그녀는 빵을 먹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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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지드

헛소리지만 그냥 얼굴 다친 카오루랑 놀라는 치사토 보고 싶어서 쓴 정말 짧은 글입니다..ㅠ



-


카오루가 깨어났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은 뒤의 일이다. 카오루가 병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정확히 말하자면 한 쪽 눈만 떴을 때 사람들은 카오루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간은 낮이었고, 카오루의 부모님은 저녁에 올 수 있다고 하며 수술이 잘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카오루가 처음 본 것은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하로하피의 멤버들과 사아야, 리미, 마야, 그리고 나.

 

“좁은 병실에 사람이 너무 많군.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야 곤란한데.”

 

모두들 카오루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카오루는 다친 뒤로 정신을 잃어서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어느 누구도 카오루에게 상태를 말하지 못했고, 거울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카오루도 자신의 오른쪽 눈이 떠지지 붕대로 감싸져 있는 걸 알텐데, 웃고 있다.

 

“카오루, 아프지는 않아? 괜찮아?”

“아, 하구미. 아주 괜찮아. 조금 있으면 기타도 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다행이다. 이거 병문안 선물로 크로켓 가져왔어.”

“응, 고마워.”

 

카오루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뒤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모두들 가끔씩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오루와 함께 웃으며 얘기한다. 학교에서 축제를 준비 중이었다. 카오루는 연극부니까 연극을 준비 중이었고, 세트가 무너졌다고 해서 처음에는 팔이 부러지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유리가 박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고, 병원에 와서 상태를 들었을 때는 더욱 놀랐다.

 

“아, 부모님은 언제 오신다고 했지. 치사토가 알고 있나?”

“응? 아, 아마 두 시간 뒤에 오실 것 같은데. 저녁에 오신다고 하셨어.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나한테 말하면 연락할 테니까.”

“그런가. 그러면 치사토랑 미사키만 놔두고 모두들 잠깐 나가주겠어. 다들 축제 준비나 아니면 개인 일정으로 바쁠테고, 두 시간 정도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나와 미사키만 남고 모두들 병실 밖으로 나간다. 1인 병실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세 사람이나 있음에도 그렇다. 미사키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카오루를 쳐다본다. 내가 뭐라도 입을 열어야 되나 생각하고 있는데, 카오루가 미사키를 부른다.

 

“미사키, 가장 가까운 라이브 일정은 전부 취소해야겠지?”

“아무래도 기타가 없는 건 좀 무리니까요. 하구미한테 기타 치는 거 부탁은 해볼까 했는데.”

“미사키가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전부 취소해줬으면 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이 와중에도 스케쥴 걱정하시는 건가요.”

 

미사키의 말에 카오루가 하하 웃는다.

 

“연극만큼 일정이 딱 맞춰져야 하는 일도 없는걸. 그런 걸 하다 보면 스케쥴부터 떠오르니까.”

“이해는 하지만…….”

“아, 그리고 치사토.”

“응?”

 

카오루가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 입을 다문다. 나는 카오루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다. 카오루를 쳐다보며 잠시 입을 뻐끔거린다. 어떻게 말해야 좋은지 알 수가 없다. 이내 카오루가 미사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역시 안 되겠어. 저기, 미사키.”

“네?”

“내 상태가 어떤지 말해줘.”

“그게…….”

“하구미한테 말한 대로 별로 아프지 않아. 정말 괜찮아. 이상하잖아. 아픈 게 아니라 그냥 눈이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왜 눈이 아니라 오른쪽 얼굴까지 다 붕대를 감아놓은 건가 생각해 봤는데…….”

“병원에 꽤 오래 입원하셔야 할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오른쪽 눈썹 위부터 광대뼈 밑까지 베였고, 유리 조각도 몇 개 박혔어요. 눈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나으면 기타는 칠 수 있나?”

“뭐, 손이 문제는 아니니까요. 아무튼 하로하피는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제발 걱정 하지 마세요.”

 

미사키가 약간 언성을 높이다가 이내 진정하고는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 거린다.

 

“그래, 걱정 안할게.”

“하아, 그러면 카오루 씨. 저는 사람들한테 말해줘야 할 것도 있으니 이만 가볼게요. 그럼 두 사람 수고하세요.”

 

미사키도 병실 문을 열고 나간다. 이제 병실에는 두 사람 밖에 없다. 미사키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해줬다. 카오루에게 필요한 게 있냐고 묻지만 카오루는 없다고 말한다. 병실이 잠시 조용해진다. 물이라도 가져오려 일어서는데, 카오루가 내 손목을 붙잡는다. 힘이 없어서 내가 뿌리치면 금방이라도 스르르 떨어질 것 같다.

 

“무슨 일이야, 카오루.”

“치사토, 사실대로 말해줘.”

“뭘 말이야.”

“얼굴에 흉터 어떻게 되는 거지?”

 

카오루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가 없다. 오른쪽 얼굴이 아픈 건지 수술의 피로 때문인지 인상을 잔뜩 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조금 있으면 울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팔에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웃을 수 있었지, 모두랑 밝게 얘기하면서. 나는 네가 뿌리부터 연기자에 가깝다는 사실에 놀란다. 네가 다쳤다는 사실보다 그 상황에서도 연기를 할 생각을 한,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해낸, 너에게 놀란다.

 

“이 병실에는 거울이 없더군, 치사토.”

“흉터가 남을 거야.”

“영원히?”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

 

갑자기 카오루가 내 손목을 놓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손을 자신의 이마에 얹은 채, 크게 하하 웃는다. 저렇게 웃다가는 상처가 벌어지는 거 아닌가 싶어 나는 카오루의 손을 잡는다. 내가 손을 잡자, 카오루가 잦아드는 웃음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걸로 리얼하게 할 수 있는 역할도 생기기는 하겠군. 생기기는 하겠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치사토.”

 

카오루가 내 뒷목에 손을 얹는다. 힘없이 내 뒷목을 끌어당긴다. 나는 카오루가 원하는 대로 카오루의 얼굴 바로 앞까지 내 얼굴을 가져간다.

 

“연기자인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내가 연기를 계속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난 생각해.”

“치사토, 내 눈을 봐.”

 

카오루의 얼굴을 쳐다본다. 한 쪽 얼굴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반쪽 얼굴밖에 보이지 않는 카오루를 쳐다본다. 오른쪽 눈이 없는 것 같다, 고 미사키에게 한 말이 계속 떠오른다. 의사는 눈이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영원히 오른쪽 눈은 감겨 있을 겁니다. 눈은 어떨지 모르겠다니, 미사키도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잘 하는구나. 나는 살짝 웃는다. 카오루도 나를 보더니 웃는다.

 

“치사토, 거짓말 하지 말아줘.”

“카오루, 난 네가 정말로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계속.”

 

아까 보여줬던 것처럼, 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난 생각하는데, 카오루, 나는, 나는 생각하는데… 네가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

 

카오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카오루의 인생에 있어 생각보다 연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놀란다.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하는 카오루를 보다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울지마, 카오루.”

“치 쨩은 끝까지 연기만 하네.”

“무슨 말이야.”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카오루가 울음을 그치려 애쓴다.

 

“예전처럼은, 예전처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거 말고.”

“연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카오루. 미안.”

“그거 말고.”

 

나는 몸을 뒤로 확 젖히고는 카오루를 쳐다본다. 미간을 잔뜩 치푸린 채, 언성을 높인다.

 

“그럼 대체 내가 뭘 연기하고 있다는 거야.”

“미안, 치사토. 내 말은 그냥…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아픈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다고, 정말.”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흐른다. 턱까지 고인 눈물이 교복 치마 위로 뚝뚝 떨어진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자기도 안 울고 연기했던 주제에.”

“그러네. 미안해.”

“다시는 다치지 마.”

“알았어. 있잖아, 치 쨩.”

“왜.”

“붕대 풀어도 얼굴 괜찮을 것 같아?”

“왼쪽도 카오루 얼굴이고, 오른쪽도 카오루 얼굴인데, 뭐가 문제야. 이제 이 얘기 그만하자.”

“그러네. 치사토 말대로야.”

 

카오루가 웃더니 내게 손을 내민다. 카오루의 손을 잡는다. 몇 분 있자, 카오루는 잠든다. 병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온다. 눈이 부셔 깰까 싶어 커튼을 치러 일어난다. 커튼을 치기 전, 바라본 카오루의 얼굴에는 햇살이 비치고 있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고루 비치는 햇살과 카오루의 얼굴을 바라보다 커튼을 친다. 하얀 색밖에 보이지 않는 커튼을 바라보다 나는 잠시 운다. 연기는 그만두고 울기로 한다. 괜찮아질 때까지 울기로 한다. 괜찮아질 때까지, 괜찮아질 때까지. 언제 괜찮아질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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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지드

“사아야.”

 

오타에는 자주 내 이름을 부른다. 용건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 자세하게 말하는 대신 그저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오타에가 뭔가를 요구할 때면 나는 그것을 맞출 수 있다. 그저 이름을 부를 뿐인데도 그렇다.

 

“물 마시려고?”

 

그런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된다.

 

“사아야.”

“아니야? 그럼 악보?”

“사아야?”

“피크 잃어버렸다고?”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리사가 미간을 찌푸린다.

 

“너희 대체 뭐 하냐. 만담이라도 하는 거면 이해해 주겠는데.”

“만담은 아리사가 더 잘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사아야?”

“그거 무슨 소리야. 혹시 비꼰거냐.”

“어쩌면 아리사보다 토끼들이 더 잘할지도.”

“얌마, 오타에! 너 이리와!”

 

아리사가 소리를 지르며 오타에를 쫓아간다. 오타에는 텅 빈 교실 이곳저곳을 잽싸게 뛰어다니며 아리사를 피한다. 토끼 같다. 평소에는 오타에가 이름을 부르고, 내가 어림짐작으로 물건을 건네주면 오타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물론 내가 예지능력이 있거나 오타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습을 한 뒤에는 보통 물을 찾으니 물을 건네주는 것이고, 연습 시작할 때나 집에 갈 때는 악기와 관련된 것을 챙기기 마련이니 악보다 피크 등을 건네주는 것이다. 약간의 눈치와 집중력만 있으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일이다. 오타에는 파악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보면 어떤 점에서는 아주 알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그걸 맞추는 게 좋았다. 오타에의 엉뚱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사소통이 매우 잘되니까, 오타에 또한 디테일하게 부탁 하지는 않았다. 사아야, 이 단어만 말하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사아야.”

“응?”

“사아야.”

“하하,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네. 오타에, 미안한데 필요한 게 뭐야? 아니면 할 말 있어?”

 

그런데 요즘에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십 중의 이는 맞췄지만 그 외에는 오타에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물어봤지만 오타에는 고개를 젓거나 다시 내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이번에도 오타에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고, 아리사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 먼저 일 있어서 스튜디오 갈 테니까, 짐 챙겨서 와라. 그 바보 같은 대화도 좀 끝내고.”

 

아리사가 교실을 벗어난다. 텅 빈 교실에 앉아 오타에를 올려다본다. 오타에는 책상 앞에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채, 짐을 정리한다. 교과서 넣었고, 숙제를 위한 노트도 챙겼고,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오타에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타에, 혹시 숙제 노트 필요해?”

“아니.”

“있잖아, 오타에. 필요한 게 있다면 혹시 이번만큼은 그냥 말로 해주라. 나 도저히 모르겠는데.”

“사아야.”

“음, 정말 모르겠는걸.”

“사아야.”

“이거 혹시 무슨 놀이 같은 거 아니지? 카스미랑 내기라도 했다거나.”

 

오타에가 고개를 젓는다.

 

“그럼 왜 말 해주지 않는 거야. 혹시 말하기 곤란하다거나…”

 

오타에가 한 번 더 고개를 젓는다.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올려다본 표정은 정말로 진지해 보여서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없다.

 

“사아야.”

“응, 왜.”

“사아야… 아, 음, 그러니까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정확히 모르겠어서 계속 불렀다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내 이름을 불렀어? 오타에, 혹시 나한테 원하는 거나 부탁할 거 있어?”

“음.”

 

오타에가 평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턱을 몇 번 두드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것 같네.”

“그럼 대체 뭘까. 나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 정확히 모른다니.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추리를 하게 되었다. 탐정이 된 기분으로 오타에를 가만히 쳐다본다. 평소처럼 집중해서 쳐다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알 수는 없었고 오히려 오타에가 나를 집중해서 쳐다보기 시작한다. 어쩐지 서로 쳐다봤던 적은 없어서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서둘러 닫는다.

 

“이러다 늦어서 아리사한테 혼나겠다. 일단은 스튜디오로 가자.”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다 고개를 든다. 오타에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반쯤 몸을 앞으로 일으킨 탓에 오타에와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정작 오타에는 눈을 단 한 번도 깜박이지 않는다.

 

“저기, 오타…”

“사아야.”

“응?”

“사아야.”

“다시 시작된 거야?”

 

내가 한숨을 쉬는데, 오타에가 내 바로 앞에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 원하는 거 뭔지 찾았어.”

“정말? 뭔데?”

“사아야.”

“찾았다면서 내 이름은 왜 또 불러.”

“사아야.”

 

오타에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린다. 의자와 책상이 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사아야.”

“그러니까, 오타에. 내 이름 왜 자꾸…….”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오타에, 아니라고 해주라.”

“사아야?”

 

자세히 보니, 오타에의 얼굴도 약간 빨갛다. 사실은 처음부터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더욱 새빨개진다. 오타에의 눈을 쳐다보는 게 힘들지만 갑자기 시선을 피하기도 힘들다. 아리사의 진짜냐, 라고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오타에가 내 손을 잡는다. 몸이 의자에서 일으켜진다. 오타에가 한 번 더 내 이름을 부른다. 내 이름인데도 듣기가 너무 힘들다.

 

“오타에, 이러다 스튜디오에 지각하면 다 네 탓으로 돌릴 거니까.”

“응, 마음대로 해. 그럼 나도 마음대로 할 테니까, 이름 계속 불러도 될까?”

“으음, 그건…….”

 

 

 

 

 

 

“오타에가 늘 하던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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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지드

앞서 말하자면 불법적이고 변태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직접적이고 세세한 묘사는 하지 않았지만 불쾌하신 분들이 있으실 수 있으니 미리 말씀드립니다.


-


그 날은 내가 카오루의 화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 날이다.

 

 

 

나는 그 날 카페테라스에 한 남자와 앉아 있었다. 잡지사의 대표였는데, 주로 섹시 컨셉의 화보를 찍어 잡지를 내는 사람이었다. 보수는 많이 주고 인지도는 확실히 오르지만 소문은 좋지 않은 잡지사였다. 주로 신인이나 애매한 입지에 있는 연예인을 타깃으로 접근해 어쩔 수 없이 화보를 찍게 하며 개인적인 일로 부르기도 하는, 한 마디로 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파스파레의 화보를 찍어주고 싶다며 회사에 컨택했는데, 회사 측에서 거절하자 나를 따로 불러내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회사가 안 되니 멤버를 불러 얘기해보려는 속내 빤히 보이는 사람 앞에서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거절할 요량으로 만나는 거지만 좋게 거절하지 않으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으니 일단 만나는 주기로 했다. 아야나 마야에게 먼저 접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회사 측에서 먼저 거절한 거라 제가 뭘 더 해드릴 수는 없는데요.”

“그럼 치사토 씨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찍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말이 입 안까지 차올랐다 회사에서 거절했으니 가라는 뜻인데, 이건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척을 하는 건지.

 

“그런 뜻이 아니라 회사 측에서 거절했다면 저희 파스파레에 이득이 안 되는 일일 수도 있는 거고, 더군다나 멤버들도 이런 컨셉의 화보를 찍고 싶어 하지는 않아서요. 저희 그룹의 이미지와 전혀 맞지도 않고.”

 

전혀, 라는 두 글자에 힘을 줬다. 정중하게 말할 테니, 오늘 만나는 선에서 끝내자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한 번 더 생각해 봐달라거나 회사에 다시 말해줄 수 있냐는 말을 해댔다. 여기서 몇 번 더 거절한 뒤, 스케줄이 있다 말하면서 빠져 나가는 게 최선일 것이다. 한 번 만나준 뒤 거절한다면 그 후에 또 연락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계속 시간을 쓰는 건 이 남자에게도 낭비일 테니, 아마 다른 타깃을 찾으러 떠날 것이다. 오늘만 넘기면 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애써 웃었다.

 

“거듭 거절해서 죄송하지만 정말 안 될 것 같네요. 더군다나 제가 이제 스케줄이 있어서 지금부터는 가봐야…….”

“스케줄이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파스파레나 치사토 씨 개인 스케줄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이 사람 뭔가 조사했나, 라는 생각에 표정을 풀어버렸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든다. 조사하지 않아도 떠봤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는 이미 내 표정을 봐버렸다. 이제는 대놓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도 대답하려는 순간 내 의자가 뒤로 쑤욱 당겨졌다.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는 게 느껴졌다.

 

“치사토는 지금부터 나하고 스케줄이 있는데 말이야. 공주님을 미리 에스코트하러 왔는데, 도무지 대화가 안 끝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게 되는군.”

 

남자가 대체 이 사람은 뭐냐는 표정으로 카오루를 쳐다본다. 내 뒤에 어째서인지 카오루가 서 있다. 뒷자리의 테이블을 보니 거의 다 마신 초코 라떼가 놓여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뒷자리에 앉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의자를 당길 것까진 없지 않냐, 고 하려는데 카오루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를 향해 있다. 남자가 테이블 아래에서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던 게 보인다. 아까 여유롭게 웃으면서 내 다리 쪽으로 손을 뻗었던 걸까, 추측하자니 몹시 기분 나빠졌다. 미소가 저절로 사라졌다.

 

“하하, 개인적인 스케줄이 있으셨군요. 친구 분을 만나는…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얘기가 안 끝나서.”

“그런가. 얘기가 생각보다 정말 길어지는군.”

 

카오루가 평소처럼 웃는다. 바보처럼 웃고 있는 카오루를 보는데, 어쩐지 뱃속에 있던 분노가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웃고 있지만 너무 과하게 웃고 있다는 점에서 카오루는 평소와 상태가 달라 보였다. 억지로 웃는 사람 같았다. 왜 억지로 웃지, 무엇 때문에. 생전 본 적 없는 카오루의 미소를 보다 카오루가 뭘 숨기고 있는지 깨닫는다. 좀 전까지 생글생글 웃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깨달은 것인데, 카오루는 지금 화를 내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확실했다. 카오루는 지금 화가 났다. 무엇 때문에, 라고 추측하는데 카오루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유리병을 집어 든다. 남자가 자리에 앉을 때, 뇌물처럼 올려둔 비타민 음료였다.

 

“요즘 뚜껑에는 구멍이 나서 나오는 게 일반적인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야.”

 

그 말에 놀라 카오루의 손에서 유리병을 뺏는다. 유리병 가운데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크기의 구멍이 나있다. 주사바늘 크기의 구멍이다. 병을 거꾸로 뒤집어 흔들자 구멍에서 아주 조금씩 음료가 새어나온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으며 불량품인가보죠, 라 답한다.

 

“하긴, 세상만사 모든 일이 완벽하지는 않지. 치사토, 하마터면 불량품을 마실 뻔했네.”

“아, 응.”

“아무튼 얘기는 다음에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남자는 갑자기 끼어든 카오루에게 이제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얘기 안 끝났다니까요.”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나와 카오루를 향해 항의하듯 손을 뻗었다. 순간 카오루가 남자의 손을 잡아채 테이블 위에 내리쳤다. 남자의 손을 꾹 누르는 카오루는 여전히 웃고 있다. 카오루가 평소에도 냉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열이 받은 카오루는 본 적이 없다. 카오루와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사태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이 일로 카오루까지 휘말려들게 해서 안 좋은 소문을 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오루를 말려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카오루, 이제 그만해.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치사토 씨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요.”

“손이 미끄러졌을 뿐입니다. 갑자기 좀 눈이 부셔서 몸의 중심을 잃었네요.”

“그, 그렇습니까.”

 

카오루가 갑자기 남자의 옷소매 단추를 뜯어냈다.

 

“이것 때문에 눈이 부셔서요.”

 

카오루가 뜯어낸 단추에서 뭔가 반짝였다. 금속이라서 반짝인다기보다는 유리가 비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열이 확 올랐다. 이런 것까지 달고 왔다니. 남자가 뭔가 더한 것을 준비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불안했지만 지금 더 불안한 것은 카오루였다. 카오루는 아직까지도 웃고 있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저렇게 억지로 웃으면서까지 감출 만큼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 낯설었다. 남자는 이제 당황하다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치사토처럼 아름다운 공주님을 어딘가에 담고 싶으셨을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죠.”

“아니요,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공장에서 나온 불량품을 마실 뻔했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량품이랑 같이 일해야 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 그, 저기…….”

“치 쨩도 그렇지만 불쌍한 아기 고양이들 괴롭히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리고 제가 다시는 당신 몸에서 뭐 뜯어내는 일이 없게 해주실 수 있나요. 약속만 지켜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러시면 아까처럼 내리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당신 손을 이 단추처럼 만들 것 같아서요.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더없이 상냥하고 정중한 말투인데, 남자는 무서운 걸 본 사람처럼 벌벌 떨어댔다. 이 쯤 압박을 넣었으면 될 것도 같고, 더 이상 사건이 커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카오루의 손을 잡았다.

 

“카오 쨩.”

“응.”

“가자.”

“그래.”

 

남자를 그대로 앉혀두고, 카오루의 손을 잡은 채 그 곳을 빠져나왔다. 잠시 걸으며 카오루에게 뭐라 말을 걸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카오루가 내 손에 뭔가를 쥐어준다. 아까 그 유리병과 단추다.

 

“무슨 일 있으면 이걸 소속사에 줘. 알았지, 공주님.”

 

나는 잠시 당황해 카오루를 올려다봤다. 카오루는 이제 예전처럼 웃고 있다. 카오루가 열을 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나도 냉정한 상태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너무나도 냉정하게 그 와중에 증거물이 될 것들을 챙겨 내게 내밀다니. 내가 걱정하는 문제들도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네. 괜히 헛웃음이 났다. 카오루가 이렇게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해주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카오루,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알면서 묻는 건가.”

“그럼 왜 화가 나는데 웃었어.”

“그 남자한테 화가 나서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

 

카오루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 네가 날 보고 있었잖아, 치사토.”

“그게 다야?”

“그게 다야.”

 

가방 안에 있는 파우치를 꺼내 단추와 유리병을 담았다. 파우치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카오루의 손을 꽉 잡았다.

 

“대답 잘 하네.”

“칭찬 고맙군.”

“카오루의 화내는 모습 신선했어. 언제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연기를 해달라는 거라면 금방 해줄 수 있지만…….”

 

카오루가 내 손을 놓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화낼 일이 다시는 안 생겼으면 좋겠군.”

“카오루, 오늘은 마음에 드는 말만 하네.”

 

어깨 위에 놓인 손을 잡아다 내 입술에 가져다댔다. 특별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화내는 모습을 다시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카오루의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추자, 카오루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평소의 카오루도 재미있으니까, 화내는 모습 같은 거 굳이 보려 애쓰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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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리지드
2018. 6. 20. 23:48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디모님의 썰(https://twitter.com/LilyDemo/status/1003825575859896320)을 기반으로 썻습니다.



-

 

오늘은 히나가 해외로 떠나는 날이다. 누구나 이름을 안다며 고개를 끄덕일 유명한 학교에 가게 되었다. 히나는 가기로 했다. 그런 곳에 유학을 갈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아니, 가기로 한 게 아니라 떠나기로 했다. 삼십 분 뒤면 비행기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공항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현관까지는 나가서 인사해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평소의 히나라면 문 앞까지 찾아와 무슨 일이냐 물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간 어쩌면 반평생을 못 볼 수도 있다. 히나는 똑똑한 아이고 외국에서 가서도 정말 잘할 테니까. 뭐든지 잘해서 거기에서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나갈 테니까.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

 

떠나기 몇 달 전만 해도 히나는 유학 같은 거에는 관심 없다며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먼저 불러준 데다가 히나라면 장학금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인에게는 좀처럼 이런 기회가 오지 않는데도 히나는 관심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 뒤에 늘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언니랑 하루도 떨어지기 싫은걸.”

 

그러니까 히나는 나 때문에 기회를 걷어차는 중이었다. 부모님에 주변 친구들, 나까지 나서서 설득을 해도 히나는 늘 같은 대답만 했다. 룽할지도 모르겠지만 관심 없다, 나는 언니와 있는 게 훨씬 좋다, 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 부모님은 내게 설득해 보라며 히나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했다.

 

“네, 저도 알아요.”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거기에는 히나의 인생이 걸려 있었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 좀처럼 없는 기회. 그리고 나는 언제부턴가 그 기회의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늘 이런 식으로 히나의 인생을 막는 사람인 것처럼. 사실 내 인생을 막아온 건 늘 히나였다고 생각했는데. 방 밖으로 나오니 히나가 소파에 앉아있다. 빨리 가버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이번에야말로 설득시키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언니이고 히나의 인생이 잘 됐으면 하는 건 사실이니까, 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TV를 보는 히나의 옆에 앉았다.

 

“히나,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응? 언니, 무슨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야. 나는 히나가 좀 더 좋은 인생을 살면서 행복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가능하다면 잘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히나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거 유학 가라는 얘기지?”

“응.”

“그렇지만 역시 싫은걸.”

“하지만 히나, 외국에 가면 너를 만족 시켜줄 즐거운 일이 더 많을 거야. 게다가 나중에는 이런 기회가 오지도 않을 거고, 어쨌든 안 하면 평생 하지 못한 게 되지만 해보기라도 하면…….”

“그렇지만.”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엄마 아빠랑 언니가 생각했을 때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난 아닌걸. 나는 언니랑 지금 같이 있지 못하고 유학 가게 되는 걸 나중에 더 후회할거야. 내가 후회하는 건 그런 종류의 일이란 말이야. 그런 좋은 기회 다른 사람들한테나 좋은 거…”

“히나! 이건 정말 좋은 기회라고! 너 대체 왜 그렇게 사람들 말을 안 듣는 거야! 너 정도 머리면 너 정도면 뭐든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겠다는 거야? 나 때문이야? 그럼 네 인생에 있어서 나는 걸림돌이야?”

“언니, 나는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그 때, 거기서 멈췄다면 어쩌면 히나가 언젠가는 마음을 바꾸고 유학을 갔을까. 언니와 모두의 마음을 이해하겠다고 미안했다고 하면서 얌전히 유학을 갔을까. 그리고 나는 공항까지 따라가 히나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줬을까. 어쩌면 그 때 소리 질러서 미안했다고 말하면서 눈물 같은 것도 조금 흘렸을까.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의미가 없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넌 이 언니가 죽어야만 유학 갈 거니?”

 

*

 

그 말을 뱉은 뒤로, 그런 말을 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킨 뒤로 반년이 지났다. 부모님 말에 의하면 히나는 역시 뭐든 잘 하고 있었다. 모두가 잘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씩 신문에 실리는 히나의 모습이나 해외 기사에 뜨는 모습, 그리고 부모님이 말해주는 모습, 같은 것으로 히나를 접할 뿐이었다. 웃으며 외국의 거리를 걷는, 영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러다 쌍둥이 언니가 있냐는 말에 지독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히나를 상상하면서.

 

그 말을 했던 날, 히나는 유학을 결심했다. 그 때 히나가 지은 표정은 여태 보여준 표정 중 가장 무표정이었는데, 나는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있을지 세어보고는 했다. 화남, 슬픔, 배신감, 절망, 짓밟힌 자존심, 어쩌면 홀가분함, 어쩌면 다행, 세다보면 끝이 없었다. 그 표정 안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 반대로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히나가 떠나고 반년이 지난 지금, 히나의 소식을 들어도 그 날의 무표정은 잘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미안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나를 쫓아다니기만 했던 히나를 떠올려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이제 모든 게 정리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이, 늘 내 옆에 붙어 있으려 하던 동생이 잘 성장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정도. 잘됐다. 잘 돼서 다행이다. 나는 신문을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는다. 히나의 사진이 맨 앞으로 올라온다. 히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책상에 올려놓는다. 기타연습이라도 할까 생각하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던가. 누구세요, 라고 말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여기 맞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 부모님 친구인가 싶어 실내화를 신고 현관에 가 문을 연다.

 

“아, 언니!”

“히나?”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히나가 내 품에 파고든다. 품에 안긴 히나의 키는 조금 큰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달라 보이는 거겠지. 나는 당황해서 히나의 이름을 몇 번 부른다.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뒤이어 든 생각은 히나가 왜 나한테 예전처럼 안기는 거지, 하는 생각이다.

 

“부모님한테도 말 안 하고 서프라이즈로 와봤어! 그런데 엄마 아빠는 없네? 언니 놀랐어?”

“히나…….”

“언니.”

“응?”

“언니 아까부터 왜 계속 내 이름만 불러.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아니면 너무 놀라서 그래?”

 

나는 잘 컸다고 잘 돼서 기쁘다고 그냥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너를 질투하는 마음도 이제 모두 정리 되었다고, 네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살려 잘 살아가는 너를 봐서 마음이 놓인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늘 히나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만 했으니까. 천재에게는 천재의 길이 있고 수재에게는 수재의 길이 있다고, 히나와 나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히나를 질투할 이유도 나를 장애물이라 느낄 이유도 없다고, 히나와 나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다른 길을 가면 된다고, 늘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런 말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언니, 그런데 내가 지금 짐이 너무 많아서. 방에 짐 좀 풀고 와도 될까.”

“아, 응, 그래. 네 방 청소되어 있어. 다녀와.”

 

히나가 커다란 캐리어를 양 손으로 들고 간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한 동안 짐을 풀고 물건을 정리하는 소리가 난다. 소파에 앉아 책상에 놓여있는 신문을 바라본다. 신문을 곱게 펴 올려놓는다. 히나의 방 안에서 서랍을 열고 닫는 소리, 물건을 늘어놓는 소리,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활짝 펴진 신문을 다시 집어 든다. 내 방에 가 책상 서랍을 연다. 연습용 악보 밑에 신문을 놓는다. 보이지 않게. 서랍을 다시 닫고 거실로 나온다. 히나가 소파에 앉아있다.

 

“가져온 짐이 너무 많아서 방이 꽉 차버렸어.”

“그러니.”

 

히나가 곤란하네, 라고 중얼 거리며 웃는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다. 곧 저녁 시간이다.

 

“히나, 오늘 부모님 늦는다고 하셨어.”

“에, 정말? 밥 안 먹고 왔는데. 깜짝 놀라게 해준 다음, 같이 저녁 식사하려 했는데.”

 

히나는 애써 옛날 일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정리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소리 지르며 외쳤던 말을 잊고 산 게 아니라 잘 생각해본 사람. 히나는 나를 보면서 웃기도 하고 예전처럼 내 근황을 묻기도 한다. 히나도 나처럼 감정을 잘 정리했나보네, 라고 생각하는데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불쑥 끼어든다.

 

“그런데 언니.”

“응?”

“아까 하려던 말이 뭐야.”

 

사요, 네가 어떤 식으로 정리했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하려던 말…….”

“아까 현관에서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닌가. 계속 내 이름 부르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작은 상자 안에 전부 모아서 집어넣는 것도, 그리고 그 상자에 자물쇠를 채우고 다신 열지 않기로 마음먹는 것도 정리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걸 청소라 부를 수 있다면 난 히나를 향한 모든 마음을 잘 정리한 사람일 것이다. 신문에 새겨진 히나의 얼굴, 나는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히나에게 돌아와서 기쁘다고 모든 게 잘 된 널 보니 좋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에 새겨진 히나의 웃는 얼굴, 그걸 보면서 생각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너는 이렇게 잘됐는데 난 그럴 수 없었다고, 너와 나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걷지만 난 네가 걷는 그 길로 가고 싶었다고. 아니, 차라리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네가 없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히나.”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서 미안하다고. 나를 올려다보며 신문 속 표정과 똑같이 웃고 있는 히나를 내려다본다.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날, 너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어도 공항까지 널 마중 나갔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히나, 너는 늘 나보다 앞서 가는구나.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그러는데 말이야.”

 

너의 그런 점을 정말로 싫어해. 하지만 너의 그런 점이 오늘은 자랑스럽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오늘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말할 수 있다는.

 

 

“오랜만이기도 하니까, 오늘 밤에는 같이 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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