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리지드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차창작[팬픽션]/사이퍼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2.04 자네트의 회고록

자네트는 무엇이 문제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제로 떠오르는 이유들이 많았다. 혼자 임무에 나가서, 빗물에 발이 미끄러지며 스텝이 꼬여서, 포탄 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늦게 피해서, 등등.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들이 쓸데없는 것부터 거창한 것까지 떠올랐다. 자네트는 이 생각들이 곧 쓸데없는 생각까지 거슬러 올라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라는 이유.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자네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러 오기는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짓뭉개져 형체가 없다시피 한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팔이 맞았다면 뛰어가서 구조요청이라도 했을 텐데. 무기를 드는 팔과 무기를 쓰기 위해 필요한 다리 중 어느 쪽이 더 아깝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어디를 빼앗아가든 상관없었다. 어디를 빼앗기든 자네트, 그녀라는 사람의 절반이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이런 몸이라면 이제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겠군, 은연중에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 기뻤다.

그녀는 어느새 너무 많은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 된 것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으로 읽혀 기뻤지만 한 편으로는 중대한 책임감이 버겁기도 했다. 그녀는 다리를 못 쓰게 되면 그런 책임감들을 자연스럽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해 조사하는 것도 이제는 벅차고 힘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죄스러움과 동시에 우스웠다. 모든 일에 대고 명예를 위해서, 라고 말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고통 앞에서 모든 단어들은 제각기 무게를 잃고 위태로워진다. 알베르토, 그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그도 정의라는 게 얼마나 가벼운지 알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그녀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다리를 찌르는 통증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다리에 맺힌 피가 검게 변해 굳어가는 게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구조대가 오기는 할까, 그녀는 시계가 없는 왼팔과 오른팔을 번갈아 바라봤다. 타라, 그 순간 그 이름이 머리를 스쳤다. 1분 늦는 것까지 시계를 보며 화를 내는 그녀라면 지금쯤 구조대를 보냈을 것이다. 타라의 생일날 자네트는 손목시계를 선물해줬다.

-이걸로 네가 지각하는 날에 혼을 내준다면 그것 참 재미있겠네.

시계의 유리 표면을 손으로 닦으며 웃는 타라를 자네트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혼을 낼 생각에 신이 난 타라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보며 내가 늦는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던 그녀가 지금쯤은 힐의 굽으로 바닥을 쳐대며 구조대를 보냈을 것이다. 타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타라,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 다리가 쑤실 때마다 자네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타라에 대해서 떠올렸다. 이제 다리가 없으니 스텝을 밟지 못하는 나를 비웃을 일은 없겠네요, 라는 농담을 칠 수 있겠지. 자네트는 농담을 칠 생각에 기쁘다가도 타라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하는 것이 두려웠다. 앞으로 보게 될 타라의 표정, 즉 미지의 표정을 상상하는 일. 화만 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네트는 이뤄질 수 없는 희망사항을 잠시 읊조렸다.

타라, 그녀는 다리가 부러진 사람도 일을 시킬 여자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니 그녀가 너무 가혹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트는 그녀의 가혹함에는 늘 다정함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가 없는 사람도 쓸모 있다고 여겨줄 여자였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리오가 왜 자신에게만 일을 많이 주냐고 성질을 부리는 게 얼마나 복에 겨운 소린지 다리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자 자네트는 고통이 줄어드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지, 자네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좀 전부터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게 되어가는 중이었다. 신경이 죽어가고 있었다. 정말로 이제 다시는 쓰지 못하겠군. 목발이라도 짚어볼 수 있겠다는 그녀의 작은 희망이 천천히 꺼져갔다. 자네트는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없이 사는 사람들의 감각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리가 시원한 감각과는 달랐다. 허전함도 아니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내게만 없는 느낌,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딱 그 정도로 절망적인 느낌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온통 새하얬다. 병실이거나 천국이거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상이 선명해지고, 주위의 소리들이 귓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병실 특유의 깨끗한 천 냄새가 났다. 마른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렇지만 말소리가 들렸고, 자네트는 고개를 왼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말소리가 그 쪽에서 났기 때문에.

-일어났니?

타라가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과 어조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지 않다는 것을 자네트는 알고 있었다. 하반신의 감각이 없는 게 여전했다. 다리가 있어야할 자리의 이불은 여전히 다리의 모양대로 부풀어 있었지만 거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말이라도 좀 해봐. 아, 혹시 말이 안 나오나?

다른 회사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이미 모두들 상태를 본 뒤 돌아갔거나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겠지. 왁자지껄하게 병상에 누운 나를 내려다볼 만큼 그들은 무례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언제든 병실의 문을 열고 태연한 표정으로 잘 지내냐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마취로 얼얼한 입을 손으로 몇 번 매만졌다.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힘이 없는 입을 열고 조그만 목소리로 타라를 향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고 제 불찰이에요.

자네트는 잠시 타라의 눈을 바라봤다. 타라의 손가락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화가 났군, 애써 물건들을 부수지 않는 타라를 바라봤다. 뭔가를 참는 표정의 타라를 보며 자네트는 미소 지었다. 타라의 눈 안에서 참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자네트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담입니다. 정말로 죄송해요.

그걸 감당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걸 자네트는 잘 알고 있었다. 자네트는 손을 뻗어 타라의 손목에 있는 시계에 손을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지각했으니 마음껏 혼내셔도 됩니다.

 

posted by 리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