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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3. 23:59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크리스마스. 12월이 와도 치사토는 이제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연예계는 12월만 되면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총결산, 새로운 작품 준비 등으로 바빴다. 아이돌이라는 생활이 추가되니 12월은 더욱 버겁기만 했다. 산타, 선물, 트리, 휴일 같은 단어는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치사토는 여유가 갖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상으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치사토는 웃으며 모든 스케줄을 차근차근 소화했다. 아주 차근차근, 이러다 보면 1월이 오고 신년이니 뭐니 하고 그러다 보면…

 

치사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비친 거울에는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있고, 오늘은 파스파레가 아닌 개인 스케줄이 있는 날이었다. 치사토는 이미 간단한 인터뷰 촬영을 마친 뒤였다. 대기실에 혼자 남아 시계를 보며 치사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삼십 분의 휴식 후 새로운 스케줄 준비를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었다.

 

“하아.”

 

한숨을 한 번 내뱉은 뒤, 기지개를 펴자 치사토의 어깨에서 으득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 날 쉬게 된다고 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치사토는 그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크리스마스, 예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어딘가에 놀러가기도 하고 장난감 같은 것을 사기도 했는데. 가족들은 각자의 일정이 있으므로 치사토가 쉬게 된다고 해도 어차피 혼자가 되고 만다. 좀 전의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는 다른 사람과 함께라는 이미지가 있는 점이 따뜻하고 좋아요, 라는 말을 했는데 정작 함께할 사람이 없다니. 치사토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러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잖아. 순간 똑똑하는 소리가 들려 치사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누구세요.”

“시라사기 치사토 씨 앞으로 배달 왔는데요.”

 

배달이 올 게 있던가. 아마 팬들이 보낸 화환 같은 거겠지. 이번 인터뷰는 나름 큰 곳에서 촬영한 거니까. 치사토는 목소리를 조금 키워 들어오세요, 라고 외쳤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배달을 온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였다. 나무…

 

“나무?”

 

치사토는 자기도 모르게 나무라고 외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난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나무가 먼저 보였다는 사실에 놀란 감정이 더 컸다. 나무가 움직이며 치사토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의 양 옆으로 사람의 손이 간신히 보였다. 치사토는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를 배달하러 온 배달원이 가엾게 느껴졌다.

 

“무거우실 텐데 아무 곳에나 내려주세요.”

“그럼 그러기로 할까, 공주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배달원에게 반문하고 싶어지려던 찰나 내려놓은 나무 뒤에서 나타난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치사토는 나무를 봤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카오루?”

“여어, 치사토. 오랜만이야. 요즈음 통 바빠서 볼 수가 없…….”

 

카오루는 치사토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가에는 늘 짓는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휘어진 눈과 입에서 보이는 상냥함은 여전했다.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네, 치사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오루를 똑바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너 같으면 안 놀라겠어? 집채만한 트리가 대기실로 배달 오더니, 그 뒤에서 나타난 게 너라고.”

“음, 확실히 그렇군.”

“대체 왜 네가 이런 걸 배달하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주는 거니까.”

“그래, 네가 나한테… 뭐?”

 

카오루는 여전히 웃고 있다. 치사토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치사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카오루의 얼굴을 본 시점부터 원래부터 있던 피곤이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

 

“아, 걱정하지 마.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있으니까. 그건 크리스마스 이브날 줄게.”

“아니, 그런 거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 왜 멋대로 이런 트리를 주는 거야. 애초에 나 몇 십분 뒤면 이 대기실에서 나가야 한다고. 그 때는 어쩔 건데.”

“내가 옮기거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카오루가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을 취했다. 치사토는 카오루를 한 대 때려야 하나 아니면 말로 때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기로 했다. 카오루의 머리카락과 스웨터에 붙은 트리의 잎들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으므로.

 

“잎 좀 떼고 말해, 카오쨩.”

“아, 이거 완전 나무가 되어버렸군. 잠깐, 생각해 보니 지금이라면 나무 역할에 이입할 수 있을지도.”

 

평소라면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나뭇잎이나 떼라고 했을 텐데, 치사토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카오루는 치사토의 큰 웃음소리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치사토를 따라 웃었다. 대기실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기려고 작정한 거야?”

“그럴 리가. 사람 하나 웃기려고 이렇게 큰 나무를 옮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럼 이건 뭔데.”

 

치사토가 트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잎이 흔들리고 가지의 작은 부분들이 흔들렸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의 산을 보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산. 아니, 트리가 너무 커서 어찌 보면 산을 가져온 것 같기도 했다.

 

“선물이지.”

“나무가?”

“음, 선물을 위한 선물이지.”

“제대로 설명…”

 

치사토는 설명, 이라고 말하다 자신이 카오루에게 지적하는 순간에도 웃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치사토는 말하던 것을 잠시 멈췄다. 카오루는 왜 그러냐 묻는 대신 치사토가 했던 것처럼 트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다시 한 번 이파리가 물결치며 흔들렸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선물 상자를 놔두려면 치사토의 집에 트리가 있어야겠지?”

“선물?”

“응, 선물. 그러니까 트리를 먼저 가져와봤어. 아, 그리고 치사토. 너도 나도 바쁘지만 그래도 며칠 뒤에 너희 집에서 보자고.”

“내 집에서? 왜?”

“왜냐니. 24일 날 함께 이 트리를 장식해야 하니까. 치쨩 그 날 집에 혼자잖아. 같이 트리 장식하자, 밤에. 피곤하다면 별 하나만 달아도 되니까.”

 

카오루가 미소 지으며 트리를 올려다봤다. 트리의 맨 꼭대기를 바라보는 카오루를 보며 치사토는 여유롭다 못해 자신의 마음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좀 전의 트리처럼 물결치듯 흔들리는 마음을 느꼈다. 카오루가 스웨터를 입어서인지 자신보다 키가 커서인지 오늘 따라 웃기긴 하지만 괜찮은 말을 자주 해서인지 몰라도, 오늘따라 카오루가 따뜻해 보였다. 치사토는 바쁜 와중에 머리카락에 초록색 잎을 꽂고 나타난 카오루를 보며 순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야?”

“응?”

“25일에 트리 밑에 선물을 놔둬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너도 피곤하고 그리고, 음, 그리고…”

 

카오루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치사토도 그런 카오루를 보며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나 싶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냥. 늦게까지 장식도 하는데 자고 가는 게 덜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서.”

 

치사토가 침을 삼켰다.

 

“그냥 해본 소리니까, 카오루.”

 

어색하게 미소 짓는 치사토를 보며 카오루는 말없이 자신의 스웨터에 붙은 잎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보풀과 함께 토독 하고 떨어져 나오는 잎을 나머지 손에 가지런히 모으다 말고 카오루는 고개를 들어 치사토를 내려다봤다.

 

“치사토가 잠들면 몰래 산타클로스처럼 선물 놔두고 가려 했는데. 계획이 물거품이네.”

 

치사토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카오루, 아직도 내가 그런 걸 믿을 것 같아?”

 

오랜만에 몸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치사토는 맘껏 웃었다. 한참을 웃다 말고 치사토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곧 매니저가 올 시간이었다. 트리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며 치사토는 카오루에게 향후 일정을 설명했다.

 

“그런가. 또 일이 있는 거였군. 그럼 이만 가봐야겠네.”

“트리는 놔두고 가. 내가 알아서 하지 뭐. 산타클로스라니… 카오루 연기 잘하니까 잘 어울릴지도.”

“흠, 그 말을 들으니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기대해도 되는 거야?”

“물론.”

 

대기실을 나서던 카오루가 문을 다시 닫고는 치사토에게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냐는 듯 치사토가 올려다보자, 카오루의 입술이 치사토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건 트리 밑에 놔둘 수가 없으니까.”

 

카오루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치사토는 뒤돌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치사토가 서 있었다. 치사토는 헛웃음을 지으며 거울을 유심히 쳐다봤다. 거울 속 치사토의 머리카락에 초록색 잎이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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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19. 22:36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야마부키 사아야는 그랬다. 뭔가를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아니, 늘 뭔가를 원하고는 있었다. 단지 사아야는 뭔가를 원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을 뿐이다. 사아야는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맞췄고, 그 삶이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자신의 이득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남들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썩 피곤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그랬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 언제부턴가 그 말이 사아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아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에 지쳤다.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아야, 도와줄 수 있어?’

 

이 말 한 마디면 사아야의 모든 것이 움직였다. 사아야는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연주를 하다가도 자주 멈췄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아야를 필요로 한다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아야는 늘 도와줄 수 있었다. 도와줄 수만 있었다.

그 날도 멤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며 사아야는 웃고 있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조금 피곤해 보여서 멤버들이 몇 마디 걱정을 던지기는 했다.

 

“아냐. 조금 잠을 못 자서.”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다. 사아야는 언제부턴가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집중력을 잃었다. 집안일에 가족 문제, 밴드, 학교, 성적, 인간관계, 같은 사람이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을 사야는 두 배로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느꼈다. 사아야는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집안 구석에 모여 있는 먼지 뭉치 같아.’

 

구르고 구르다 결국 구석까지 내몰린 먼지 뭉치. 쓸려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아야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아야는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그 날은 하교 후, 버스를 타고가 스튜디오에 도착하기로 했다. 연습이 있었다. 사아야는 연습 후, 빵가게 일을 도와줄 예정이었다. 사실 연습 날도 빵가게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로 옮긴 것이었다. 그런 것마저 스트레스였다. 멤버 모두가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벨을 누르고 뒷문에 모여섰다. 사아야는 맨 뒤에 서 있었다. 옆에는 오타에, 앞에는 나머지 멤버들이 있었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고, 멤버들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사아야는 오타에보다 살짝 앞에 서 있었는데, 내리려다 말고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사아야는 몸에 밴 습관을 버릴 수 없었다. 먼저 내리라는 의미로 사아야는 오타에의 이름을 불렀다.

 

“오타에.”

 

오타에는 버스에서 내리는 대신 사아야의 허리에 손을 감고 뒤로 살짝 끌어당겼다. 버스 기사는 그걸 내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대로 출발했다. 사아야가 당황해서 벨을 누르려 하는데, 오타에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오, 오타에? 왜 안 내렸어?”

 

사아야가 묻기 무섭게 오타에의 전화가 울렸다. 카스미였다. 카스미의 전화를 받은 오타에는 한 마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 카스미. 갑자기 일이 생겼어.”

 

사아야는 당황했다. 왜 내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버스가 계속 간다면 자신의 집과도 멀어지는 꼴이었다. 계속 가면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 생각하는데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아야를 쳐다봤다.

 

“사아야, 저 자리 어때?”

 

오타에는 사아야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2인석이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창가 자리에 앉힌 뒤, 그 옆에 앉았다. 사아야는 이 쯤 되니 당황을 넘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오타에가 원래 엉뚱한 말을 하고 가끔씩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는 건 알았지만 이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사아야는 하루 일정이 전부 꼬였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오타에,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당장 내려야해. 일단 이 버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내리고 싶었어?”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연습하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당연히 내렸어야지.”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사아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오타에도 사아야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올려다보면서 내 이름 불렀잖아.”

“그게 왜?”

“정말 내리고 싶었어?”

 

오타에가 사아야를 내려다봤다.

 

“오타에, 장난은 이쯤 하고 일단 내리자.”

 

다시 벨을 누르려 사아야가 손을 뻗었다. 오타에가 사아야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힘은 주지 않았지만 벨을 누르지는 못할 정도였다.

 

“난 사아야가 내리고 싶지 않아서 날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뭐?”

“내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걸.”

“그게 무슨…”

 

사아야는 화를 내려다 말고, 숨을 한 번 참았다. 몇 초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버스 안에서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사아야는 계속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참았다. 오타에의 행동과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아야는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는 이 상황이 싫었다. 카스미는 왜 오타에의 말 한 마디만 듣고 다시 전화도 하지 않는 걸까. 그 순간, 사아야는 휴대폰을 꺼냈다. 카스미에게 전화해보자는 생각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이 지연되는 게 아니니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아야.”

 

오타에가 사아야를 불렀다. 전화를 걸려다 말고, 사아야는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오타에는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사아야의 손은 여전히 휴대폰을 잡고 있었고,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휴대폰은 놔두고, 버스에서 잠깐 자는 게 어때?”

 

사아야는 이 쯤 되니 오타에가 생각이 없거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타에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기는 했지만 사람을 화나게 할만한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난이라기에는 집요해 보였다. 집요, 아니, 절실해보였다.

 

“오타에 원하는 게 있어? 원하는 게 그거야? 그렇지만 나 오늘은 아주 바쁘거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부탁 들어줘.”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부탁 들어주면 도와줄게.”

 

점점 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아야는 이제 한숨을 쉴 기운조차 없어 그냥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벨을 누르려 하면 오타에가 손을 뻗을 것이다. 사아야는 일단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오타에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무엇을 들어주겠다는 거야, 라고 물으려는데 오타에가 입을 열었다.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그러니까 도와줄게.”

 

사아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오타에의 말대로 잠이 오는 것도 같았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이 감기려 했고, 사아야는 이러다가는 정말로 부탁을 들어주게 되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 안에서 잠들면 큰일인데도 사아야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정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 근래 잠도 자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한순간 화낸 뒤, 긴장이 풀리자 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졸리는 와중에도 사아야는 말을 이어가려 애썼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사아야는 눈이 감기는 순간 오타에가 속삭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아야, 잘 자.”

 

*

 

사아야가 눈을 떴을 때는 종점이었다. 버스들이 몇 대 줄지어 선 터미널에서 내린 사아야는 이제 화가 나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잠을 자고 나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오타에는 이제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사아야가 종점까지 잠들 줄은 몰랐는데.”

 

저녁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사아야는 당황해서 눈을 피하는 오타에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그러기야?”

 

사아야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을 묻기 위해 안내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 오타에가 사아야의 어깨를 잡았다.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을 때처럼. 사아야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냐는 듯 오타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사아야는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오타에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사아야를 앉혔다.

 

“내가 물어보고 올게.”

 

사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타에가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잠에서 깨어나 뻑뻑한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눈이 건조하면서도 시렸다.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양 손으로 눌렀다. 몇 분 정도 그러고 난 뒤에야 오타에는 돌아왔다. 오타에의 손에는 따뜻한 캔 음료가 두 개 들려 있었다.

 

“깨죽?”

“맛있어 보여서.”

 

깨죽이 캔에 들어있으면 그건 음료일까 아닐까, 오타에는 그런 소리를 하며 따뜻한 캔을 사아야의 볼에 가져다댔다. 사아야는 자신 몫의 음료를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아야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캔을 양 손 안에 가둔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오타에는 옆에서 말없이 깨죽을 마시거나 후후 불어대거나 했다. 오 분 정도였을까, 사야는 그제야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삼십분 뒤에 온대.”

“응?”

“버스 말이야.”

“아, 응.”

“그거 타면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사아야는 적당히 식은 캔의 뚜껑을 땄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고소한 냄새가 캔 안에서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맛있네.”

“그렇지?”

 

오타에는 깨죽을 절반 이상 마신 상태였다. 사아야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깨죽을 마셨다. 평소라면 삼십분 이라는 시간 동안 시계를 보기도 하며 언제쯤 미리 나가 있어야 좋은지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차를 놓쳐도 다음 차가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빵집에는 내가 연락해뒀어.”

“뭐, 정말? 오타에, 너 생각보다 철저하구나.”

“지금은 칭찬해줘야 하는 타이밍 아냐?”

“하하, 그건 그러네.”

 

사아야가 웃는 소리가 터미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오타에,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버스에서 안 내린 거야. 아까는 조금 화가 나서 물어봤는데, 지금은 정말 화 안 났으니까.”

 

오타에가 사아야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잠들기 전 본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비슷하다 생각했다.

 

“사아야는 걱정이 너무 많아.”

“글쎄, 오타에가 걱정이 없는 게 아닐까.”

 

사아야는 그 말을 한 뒤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럽다는 의미야.”

“사아야는 내가 왜 걱정이 없는 것 같아?”

“응?”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 했다. 말없이 깨죽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거든. 그래서 걱정이 적은 거야.”

“그건 좋은 일이네.”

“사아야.”

“응?”

“사아야가 힘들 때는 누가 도와주는 거야?”

 

오타에는 다 마신 깨죽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왔다. 사아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가 버스에서 내 이름을 불렀잖아. 도와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 그것뿐이야.”

 

몇 십분 뒤에 버스가 도착했다. 사아야와 오타에는 2인석에 앉았다. 이번에도 사아야가 창가 자리, 오타에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사아야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오타에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잠깐 잘 테니까, 이번에는 꼭 제 때 깨워줘.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꼭.”

 

오타에의 어깨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오타에는 만족했고, 사아야도 그랬다. 버스가 출발하고, 사아야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사아야는 한 가지 말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사아야에게 있어서 부탁이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시간 비워놔. 그 때도 이렇게 도와줘.”

 

오타에는 대답하는 대신 사아야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좀 전까지 따뜻한 캔을 쥐고 있었던 손은 따뜻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바라보다 말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얀 색으로 변하면 더 예쁠 것 같았다. 시간은 언제든 비워놓을 수 있지. 오타에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아야, 좋은 꿈 꿔.”

posted by 리지드
2018. 10. 12. 16:49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파블로 네루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

 

언젠가 사아야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울어본 적이 있다. 무언가가 끔찍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러다 못 참겠다 싶을 때 울게 되고는 하는데, 사아야는 자신이 끔찍하다고 생각해서 울었다. 사아야는 우는 와중에도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멋쩍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울음이 좀 멎을 것도 같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아야는 손에 든 잡지의 무게감을 느꼈고 그 잡지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울었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찬 수건으로 누르며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병가를 냈다. 회사를 다닌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낸 병가였다. 상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빨갛게 부은 눈에 수건을 눌렀다 뗐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수건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눈의 따가움이 줄어들었다 느껴졌을 때, 사아야는 침대로 돌아가려다 말고 용기를 냈다. 책상에 있는 잡지를 집어든 것이다. 잡지 표지에 실린,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도 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와서 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생각 하는 자신이 끔찍하다 느껴져 울음이 터졌던 것이다. 사아야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사아야는 잡지를 버리려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수정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사아야는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의 목록에서 리미의 이름을 찾아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살짝 당황한 목소리-그렇지만 기뻐서 톤이 올라간 것도 느껴지는-가 사아야를 반겼다.

 

“저기, 리미.”

“앗, 사아야. 잘 지내? 어쩐 일이야?”

 

사아야는 여기서 잠시 멈췄다. 어제 울었던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이 끔찍하다 생각하며 터트린 자기연민의 울음 같기도 하고, 이제 와서 그녀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사아야는 잡지 표지의 여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떠올렸다. 심지어 그 페이지가 몇 페이지인지까지 떠올렸고, 결심을 굳혔다.

 

“오타에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

 

오타에의 전화번호를 받기는 했지만 사아야는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연락을 받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오타에가 연락을 받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보통은 바쁘거나 매니저가 전화 받거나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계속 했더니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래서 전화를 하지 못했다. 대신 리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최근에 오타에를 만난 적 있냐 물었고, 리미는 대답 대신 이번 주말에 오타에의 콘서트가 열리는데 거기 한 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리미는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를 간간히 내비쳤다. 사아야는 리미의 그런 점이 상냥해서 좋았고, 고맙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자, 잘 모르겠지만 힘내.”

“응, 그럴게. 고마워, 리미링.”

 

리미링, 이라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아야는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리미링이라는 말을 해본 게 얼마만인지 같은 생각을 했다. 다음에 다른 포피파 멤버들도 만나야겠다, 는 작은 다짐을 하며 휴대폰으로 콘서트에 대해 검색했다.

 

‘하나조노 타에 WINTER CONCERT’

 

일본 전역이라니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해도 일정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왔다 갔다 하는 콘서트 일정이라면 어쩐지 소속사 보다는 오타에가 제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곳곳을 이동하는 건 소속사에 이득이 안 되는 일일수도 있고. 심지어 표 값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기행을 하는 오타에라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 덕에 오타에의 콘서트 인기는 한층 더 높은 것 같았다.

사아야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연도 보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 너무 먼 곳은 안 되고 이번 주말에 한다는 콘서트도 사아야의 집 근처였는데 그 공연은 이미 볼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암표를 사면서까지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아야의 목적은 어찌됐건 오타에를 만나기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전화했을 때 리미는 오타에는 거의 매니저랑 같이 다니지 않아서 공연 대기실로 가면 그냥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줬다. 몇 번 오타에의 콘서트에 갔었다는 리미는 오타에가 무료로 공연을 보여줬다고 했다. 객석 맨 앞자리에 앉혀준 뒤, 관객들에게 리미를 소개하기까지 했다고.

 

‘포피파의 멤버라고, 정말 좋아하는 밴드고 친구라고 소개 시켜줬어. 조금 놀라고 부끄럽기는 했는데 엄청나게 기뻤어.’

 

사아야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포피파를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나러 가면 오타에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아직도 나를 포피파의 멤버로 생각해줄까, 그런 생각들이 사아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사아야는 그럴 때마다 인터뷰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아야는 대기실에 찾아가 1대 1로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대기실에 누가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겠지만 적어도 대기실이라면 1대 1로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아야는 주말을 기다렸다. 주말이 되면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정리했다. 완벽한 문장이 되고 그게 한 문단 정도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완벽히 외울 때까지.

 

*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사아야는 대기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꽃다발을 주려는 사람들 틈새로 재빠르게 지나갔다. 경비원은 발견하지 못했다. 대기실 문 앞에 선 채, 사아야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시작은 고등학교 삼학년 말 무렵의 일이었다.

사아야는 해가 질 무렵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졌다. 혼자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같이 가려고 한 건지 청소가 끝날 무렵 오타에가 교실로 들어왔다. 청소를 하고 정리하는 사아야를 가만히 쳐다보던 오타에는 그날따라 말도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오타에가 갑자기 말을 건넸다.

 

‘사아야, 좋아해.’

 

그 때 사아야는 도망쳤다.

가방을 빠르게 챙겨들고 교실을 벗어나 뛰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 사아야는 당시에 뛰면서도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 정문까지 뛰어갔을 즈음에야 사아야는 자신을 쫓아오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자신을 부르는 오타에의 목소리도 없었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아야는 두 번째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아야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뛰어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찾지 못하고 잠이 들려는 순간, 뛰어가는 자신의 발소리 뒤로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아야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타에도 그렇게 했다. 사과를 하거나 그 날에 대해 뭐라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아야는 포피파 활동을 할 때, 가끔씩 당황하거나 연주를 틀리는 정도의 문제를 겪었다. 몇 번 연습에 결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타에와는 필요할 때만 대화했다. 사아야는 자꾸만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오타에를, 교실에 혼자 남겨진 오타에를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워서 사아야는 밴드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모두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아야가 더 이상 오타에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포피파의 연습을 가는 것조차 괴롭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다들 대학교 생활로 생각보다 바빠졌고, 밴드 연습을 하는 시간은 고등학교 때보다 줄어들었다. 사아야는 이 때, 연습에 부러 더 많이 빠지기도 했다. 흐지부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포피파는 대학교 시절 해체했다. 사아야는 자신이 조금은 해체에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아야는 연습에 자주 나가지 않았고, 참여했을 때에도 몇 번은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라이브는 어떻게든 잘해냈지만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나태해졌다. 나태해졌다기 보다는 관심을 줄이고, 좀 더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아무튼 포피파는 해체했다.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시 함께, 같은 조건을 카스미가 붙였지만 사아야는 그 때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과의 밴드가 해체되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고, 그것 또한 사아야의 마음속에 죄책감으로 남았다. 사아야는 점점 멤버들을 만나는 횟수도 줄여갔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말없이 모든 것에서 멀어졌고 떠났다. 가끔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흐릿하게 말했다. 심지어 오타에한테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오타에의 입장에서는 실종된 것일까, 아니면 밴드 해체의 원흉이 사라져 기쁜 것일까. 사아야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정작 본인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생각들을.

오타에는 대놓고 말한 적 없지만 밴드 활동을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언젠가 오타에가 웃으며 했던 말을, 사아야는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서 내보낼 수 없었다.

 

‘계속 혼자서 기타를 쳐서 그런지 밴드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워.’

 

사아야는 대기실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그렇지만 시간을 오래 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연습했던 문장들을 머릿속에 되새긴 뒤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것은 오타에였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오타에를 보고 사아야는 당황해 아, 하는 소리만 냈다. 오타에 또한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뜬 채 말없이 서있었다. 이내 오타에는 사아야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났다. 사아야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며 오타에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 오타에. 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 말을 들은 오타에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잠갔다. 사아야 또한 얘기하는 도중 누가 들어오는 것은 싫었으므로 그 행동에 조금 진정되었다. 대기실에는 의자가 몇 개 있었는데, 오타에는 아무 의자에나 앉은 뒤 맞은편에 놓인 의자와 사아야를 번갈아 쳐다봤다. 사아야는 잠시 망설이다 의자에 앉았다. 사아야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긴장이 되는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하하, 하고 실소했다. 그 옛날 오타에는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내게 고백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동시에 어떠한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오타에는 사아야가 말하기를 기다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과하러 왔어.”

“사과? 무슨?”

 

사아야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말했다. 그 날 자신이 도망친 것에 대한 미안함, 도망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자신, 은근하게 포피파 활동이 중단되도록 한 것, 그리고 왜 자신이 사과하러 왔는지에 대해서. 사아야가 본 잡지 인터뷰에서 기자는 오타에에게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잡지에는 한 줄로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던 시절

 

이라는 말만 적혀 있었고, 사아야는 그 말을 본 순간 오타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타에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빼앗아간 건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과해서 내 맘만 편해지는, 그런 이기적인 선택 같기도 해서 고민했는데, 그래도 오타에에게 전부 다 말하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서. 포피파… 계속 열심히 했다면 지금까지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하니까.”

 

오타에는 무표정으로 사아야의 말을 들었다.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조용했다. 사아야는 숙인 채로 있던 고개를 들어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는 이제 오타에가 욕을 하든 자신을 용서하든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다. 사아야의 무릎과 그 위에 놓인 손이 덜덜 떨렸다.

 

“난, 사아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포피파를 자기가 해체 시켰다고 생각하다니. 난, 그냥,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 우리들 정말로 바빴으니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뭉치기로 했고, 그건 불만 없는걸. 난 의외로 지금 혼자서 노래하는 나 자신도 좋아하게 되었어.”

“그럼 왜 밴드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썼어? 오타에는 혼자서 기타 치는 것보다 밴드에서 기타 치는 걸 더 좋아했잖아.”

“사아야, 그 말 기억하고 있구나.”

 

오타에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돌아왔다. 오타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예전에 자주 봤던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웃는 오타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있지. 사실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너한테 고백했을 때야. 왜인지 알아?”

 

사아야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오타에가 그 날의 일을 꺼내면 뭐라고 해야 하나, 몇 번이고 대답을 상상했지만 대기실 문을 두드리던 순간까지도 마땅한 대답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사아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백을 안 하는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었어. 아니야, 울지마, 사아야. 밴드를 못하게 돼서가 아니야.”

 

오타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아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사아야가 얼굴을 양손으로 감추자, 그 손을 천천히 떼어낸 뒤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댔다. 사아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당분간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널 다시 못 보게 되니까 그랬어.”

 

사아야가 오타에의 눈을 쳐다봤다. 오타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아야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무릎을 떨었다.

 

“사아야, 내가 왜 전국에 콘서트를 열었다고 생각해? 혼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거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점 유명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왜일 거라고 생각해.”

 

사아야는 몸의 중심을 잠깐 잃었다. 의자가 순간 미끄러졌고, 사아야는 그대로 앞을 향해 주저앉았다. 오타에는 당황하지 않고 쓰러지는 사아야를 받아냈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를 안은 채였는데, 사아야는 오타에를 밀어낼까 하다 그만뒀다. 그대로 오타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타에의 어깨가 점점 축축해졌다.

 

“오늘 같은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 난 그냥 사아야,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난 아직도 너를 좋아해.”

 

사아야는 생각했다. 내가 연락도 하지 않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도망쳐있는 동안, 그 긴 시간 동안 오타에는 여전히 나를 좋아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교실에 혼자 남겨진 채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그 날 오타에는 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교실 문을 닫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하…….”

 

사아야가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오타에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밴드가 없어진 것보다 밴드가 없어져서 사아야를 보지 못하게 된 사실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교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계속 해서 고백한 사실을 후회한 것이다. 도망친 건 난데, 계속 후회하면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는 말을 삼켰을 것이다. 사아야는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사아야의 몸이 앞으로 늘어졌다. 오타에의 가슴까지 얼굴이 떨어졌을 때, 사아야는 간신히 팔을 뻗어 오타에의 어깨를 잡았다. 오타에가 걱정이 되는지 사아야? 라고 작게 불렀다.

 

“끔찍해.”

“그, 사아야. 나는 네가 여태 그런 생각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미안.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아야가 고개를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보여줬던, 드럼에 집중할 때면 드러났던, 확신에 찬 표정이다. 든든하고 굳건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오타에는 오랜만에 본 사아야의 표정에 놀라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그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지.

 

“그럼, 사아야.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 때 왜 교실에서 뛰쳐나간 거야?”

 

끝까지 도망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오타에를 보며 사아야는 오타에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상냥한 사람인거야, 나 혼자 완전 비참하고 끔찍한 사람 같잖아. 사아야는 여태까지 자신도 제대로 대답 내리지 못한 질문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왜 그 때 도망쳤지. 사아야는 잠시 생각했고, 생각보다 아주 쉽게 답을 찾아냈다.

 

“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너무, 너무 갑작스럽고 무서웠거든. 밴드 일이 그렇게 된 것처럼 무서워서 도망쳐버렸어.”

“뭐가 무서웠는데?”

“난, 그, 하하… 이제 와서 이유를 알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아니.”

“내 집안은 나름 보수적이었고, 나 자신도 그 때 약간은 보수적인 아이였거든. 그런데 오타에 너는 정말 자유로워보여서… 네가 손해 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 짧은 순간에 너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았어. 오타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너랑 함께 있는 미래를 그 때 상상했다는 건데…… 아니, 이제 와서 무슨. 그냥 차라리 화를 내줘.”

 

사아야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오타에, 그 때 나도 널 좋아했었어.”

 

오타에의 무릎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차갑다, 고 생각하며 오타에는 옛날 생각을 잠깐 했다.

 

“사아야, 너 예전에 연습할 때마다 과감하지 못하다거나 진입하는 부분이 느리다는 말을 들었잖아. 기억나?”

“그래, 그거 기억나. 카스미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웃었어. 아리사가 주로 화를 냈지. 난 겁도 많고 뭔가 한 박자 느린 편이니까.”

“사아야.”

“응?”

“난 그럼에도 끝내 맨 뒤에서 드럼을 쳐준 그 모습을 좋아했어.”

“지금도?”

“지금도 다시 여기까지 와줬잖아. 한 박자 느렸지만. 사아야, 내 공연들 티켓이 왜 싼지 알아? 혹시 네가 돈이 없거나 가난하게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했어.”

“정말?”

“정말이야. 진짜 웃기지. 아, 이제 안 우네.”

 

사아야는 웃음을 터트렸고, 웃음이 멎은 뒤에는 미소 지은 얼굴이 되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오타에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눌렀다.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양 손으로 오타에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조금은 당황했는지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사아야의 손가락이 오타에의 볼을 톡 건드리거나 가볍게 문질렀다.

 

“오타에, 오늘 바로 카스미한테 전화해서 밴드 얘기 해볼 거야.”

“정말?”

 

오타에가 눈에 띄게 기뻐하더니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아야는 그 얼굴을 보고 전화 정도는 잠깐 미뤄도 될 것 같다 생각했다. 아니,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시간 조금 내줄 수 있어?”

“응, 얼마든지. 무슨 일인데?”

 

사아야는 오늘만큼은 뒤도는 대신 한 발자국 전진하기로 했다. 사아야가 몸을 앞으로 움직였고, 오타에의 입술에 사아야의 입술이 닿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오타에가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사아야는 오늘 한 발자국 전진할 생각이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공연 관계자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대기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posted by 리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