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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지만 내용은 긴데, 연성이 전보다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반성하게 되는 글.. 입니다.
호칭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어색해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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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 세 명과 술을 마시는 일이 많다. 나, 카오루, 히나, 리사. 대학교에 진학한 뒤로 바빠 밴드간의 교류는 거의 못하지만 그래도 동갑내기여서인지 아니면 서로가 아는 사이여서인지 어쩌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었다. 보통은 카오루가 먼저 취하고, 그 다음 히나, 그 다음 리사, 나는 모두를 집에 보내는 담당이 되어있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편이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 별 문제는 없었지만. 술에 취하면 하나같이 외롭다고 술주정을 하는 게 정말로 보기 힘들었다. 특히 가장 어른스러워 보였던 리사마저 유키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 사람들 괜찮은 건가 싶은 기분이 된다. 히나는 저번 주에 언니, 라고 울부짖으면서 울음을 터트렸고 카오루는……
“정말이지 덧없군.”
이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카오루의 얘기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카오루가 멋지다고 접근한 사람들과 사귀거나 분위기가 좋아질 즈음, 모두가 카오루의 본 모습을 조금 엿보고 나면 떠나간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카오루는 이렇지 않아, 라던지 왕자님이 아니잖아, 라던지 자꾸 헛소리만 하잖아, 라던지. 뭐 그런 것들. 그래서 세 사람은 늘 술을 들이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해산하기 전에 매번 ‘진짜 덧없다.’ 라는 말을 엔딩 멘트마냥 하면서 헤어지고는 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부르면 안 가기도 뭐했고. 무엇보다 가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그래서 매번 갔다.
어느 날은 술집에서 나와 각자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헤어지려는데, ‘세타 선배의 모든 모습을 좋아할 수 있어요.’라고 호언장담하는 아이를 술집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카오루는 그 말에 헤실헤실 웃으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래서 나는 집에 혼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히나가 집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따라왔다. 날 보며 웃는 히나의 얼굴에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까지 걷는 동안 얼굴이 빨개진 히나는 사요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고, 리사나 카오루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같이 따라간다거나 하지 않는 거야?”
“뭐 위험한 아이도 아닌 것 같고, 카오루가 좋다는데 내가 그 자리에 따라가서 뭐 하겠어. 재미도 없고.”
“그 아이도 어차피 카오루는 내가 원하는 왕자님이 아니었어, 이럴 텐데 치사토는 상관없나보네?”
“저기 히나, 적당히 해두는 게 어떨까?”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피곤하다는 것을 표정으로 내보이자, 히나가 짧게 미안이라고 말한다. 살짝 웃으면서. 괜히 히나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안 좋아진다.
“치사토는 엄청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충고 한 마디 하자면 언젠가 카오루의 저 이상한 연애의 시작점 말이야. 카오루의 좌절… 말이야. 매번 반복되는 고리를 끊어야 하는 날이 와야한다는거야.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있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히나, 지금 말장난 하자는 거야?”
“글쎄.”
히나는 가끔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고등학교 시절에도 늘 신기했다. 이제 데뷔한 지도 몇 년이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쩐지 내 속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편하기도 했다. 아마 알고 있겠지. 내가 카오루를 좋아한다는 것도, 그리고 고백할 마음이나 용기가 없다는 것도. 나는 늘 손해 보지 않으면서 실패할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는걸. 배우 생활도 아이돌로서의 생활도 늘 그래왔는걸. 히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모든 걸 알고 있어도 나를 부추기지는 않는다. 그건 좋았다.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
“히나 너도.”
피곤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히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카오루는 인기가 많아서 내가 질투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은 사실 무척이나 많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줬으므로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는 그런 카오루의 모습도, 사실은 실속 없어 보이고 허술하지만 마음만은 늘 자상한 카오루의 모습도, 사랑하게 될테니까. 바로 나처럼.
“아.”
고백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도와줄 용의도 없다. 가끔씩 카오루를 따라 다니는 아이들에게 카오루의 본래 성격을 말해버린다거나 카오루가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카오쨩, 이라고 부르고 옛날 얘기를 꺼내 카오루를 당황시킨다거나. 카오루를 진심으로 좋아할 것 같은 아이들은 내 선에서 쳐낸다거나. 그런 짓을 해버리고는 한다. 한 마디로 카오루의 술주정이 더 심해질 때까지 놔두는 건 나다. 가끔씩 스스로가 최악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카오루 쪽에서 도와달라거나 어떻게 하면 좋은 거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이래 뵈도 소꿉친구인걸, 상담 정도는 받아주니까. 치사토라면 뭐든지 잘 알 것 같으니까, 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무슨 모습의 나를 바라는 걸까, 라는 말도 했고. 물론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도와줄게, 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 하지만 카오루한테는 그런 말이 나오지를 않아. 다른 말이 나와 버릴 것 같아.
“치사토,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하니? 문 앞에 서서.”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집 안에 있던 엄마가 문을 열어준다. 순간 얼굴에 몰려있던 열이 가시고, 머리끝까지 몰려있던 감정이 가신다. 가끔씩은 카오루 앞에서 화내거나 울 것 같아서 그러다 이 감정을 말해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나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는 날이 올까 봐, 평소와 전혀 다른 내 모습을 카오루가 보게 될까 봐, 그게 무섭다. 다른 아이들이 카오루를 떠난 것처럼 카오루도 나를 떠날까 봐.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술기운에 더워져서 방 안에 있는 에어컨을 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히나가 괜히 이런 말 저런 말로 부추겨서 이런 거라며 탓해보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는다. 널 내 걸로 만들고 싶은데 너를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의 이상적인 모습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타인에게 잘 대처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카오루를 볼 때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트럭으로 갖다 줘도 관심이 없어. 그렇게 말하면 카오루는 그럼 치사토는 누구를 좋아하냐 묻고, 나는 고양이처럼 뒤로 한 걸음 빼며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인다. 아, 정말로 관심 없어. 필요도 없지.
*
오늘도 이렇게 되어버렸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누른다.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게 느껴진다. 내 눈 앞에는 술에 잔뜩 취한 카오루와 히나, 리사가 있다. 카오루의 부모님이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카오루는 처음에 나를 초대했다. 그래도 단 둘이 있는 것보다는 셋이 더 재미있을 테니까 내가 히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는데, 히나가 길 가다 우연히 만났다며 리사를 데려왔다. 그래, 그리고 대학생이니까 같이 요리를 해서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술을 마셨지. 그것까지는 기억나고, 술에 조금 취한 히나가 신기하다며 카오루 집에 있는 매실주를 딴 것까지도 기억난다. 그리고 지금 이 모양이다.
“그러니까, 언니는 대학생이 돼서도 바쁘다면서 방에 못 들어가게 하고! 히나,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바쁜 사람이라고 그러잖아. 언니랑 그냥 대학교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유키나는 매일 연습, 연습, 대학교 가더니 노래 잘 하는 사람들 많이 만나서 불이 붙어버렸다니까. 이제는 쿠키를 주러 가면 쿠키만 받고 연습해야 한다고 들어가 버리고. 나 정말이지 외롭단 말이야.”
어떻게 집에 돌려보내지. 오늘은 셋 다 유별나게 취했다.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울고 있다. 나는 내 휴대폰 연락처에 유키나 씨와 사요 씨의 번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카오루는 어쩐지 번호가 있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카오루를 쳐다보지만 카오루도 별 희망이 없는 상태다. 새빨개진 얼굴을 한 카오루는 두 사람에게 진정해라, 아기 고양이들… 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물론 진정해라, 아기 고양이들, 이라는 말은 벌써 여섯 번째에 달했다. 이대로 다들 잠들어 버리고 나는 바로 옆집인 내 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술을 더 먹고 잠들어 줘, 라고 생각하며 내 잔에 담긴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신다. 맛은 있네, 그만큼 연거푸 마시다 보면 취하기 쉽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세 사람을 바라본다. 히나와 리사는 이제 거의 유키나와 사요라는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중이다.
“그런데 말이야, 카오루는 말이야!”
갑자기 히나가 카오루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정신을 차리려는 건지 물을 마시고 있던 카오루가 응? 이라고 말하며 히나를 쳐다본다.
“카오루는 매번 인기 많아서 좋겠다. 매번 잘 안 되기는 하지만 모두가 카오루를 좋아하잖아.”
히나의 말에 리사가 맞아, 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게, 카오루 인기 엄청 많잖아. 주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청 룽하다.”
히나가 양 팔로 크게 원을 그린다. 카오루가 웃기만 하며 대답하지 않자, 히나가 카오루를 빤히 쳐다본다. 저건 뭔가 대답할 때까지 쳐다보겠다는 눈빛이다. 카오루가 저 눈빛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듯 나를 쳐다보지만 대체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어, 라는 생각에 시선을 회피하며 술을 마신다. 그런데 카오루가 어쩐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계속 쳐다보고 있다. 왜 그래, 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카오루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입을 연다.
“인기라면 치사토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데.”
“뭐?”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갑자칩을 들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준다. 감자칩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 식탁 위에 떨어진다. 카오루가 물 옆에 있던 매실주를 물처럼 들이킨다. 좋지 않은데, 라고 생각하며 물 컵을 내밀려고 하는데 카오루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사람들은 모두 치사토를 좋아해주잖아. 치사토의 모든 면을 좋아해주고, 그리고 치사토는 모두에게 능수능란하게 잘해주고. 나는 이제 그런 거 잘 못하겠다고. 치쨩은 왜 매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 옛날 얘기 꺼내는 거야. 울보였다는 얘기 같은 거.”
이건 명백하게 취했네,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피곤해, 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술이 든 컵을 벌컥벌컥 들이킨다.내 모습에 놀랐는지 리사가 술이 깨려 애쓰며 저기 두 사람, 이라고 말을 건다.
“저기 카오루, 좀 취한 것 같은데.”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내가 말을 꺼낸다. 카오루가 다시 나를 쳐다본다.
“난 집에 돌아가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카오루가 내 손목을 붙잡는다. 방금 들이킨 술 때문인지 순간 어지러워 비틀거린다. 비틀대다 다시 자리에 앉게 된다.
“난 치사토가 어떻게 남들 앞에서 매번 잘 웃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사람들은 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어, 이러면서 나를 떠나는 건데. 그리고 치쨩은 왜 자꾸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내 모습을 말하는 거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나는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그리고 입에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집에 가야해, 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리사와 히나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본다. 하지만 두 사람이라고 카오루를 잘 말릴 것 같지도 않아서 나는 일단은 카오루의 술주정을 들어주기로 한다. 카오루와 눈을 마주친다. 시라사기 치사토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된다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린 뒤, 입을 연다.
“그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카오루.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치쨩은 매번 내가 상담해도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것도 사과할게,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다시는…….”
카오루가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다. 지금이면 진정했겠지 싶어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며 짐을 챙긴다. 취해서 이만 가봐야겠어, 카오루, 미안. 이라고 말하는데 카오루가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앗차, 하고 생각한 순간 이미 늦었다. 카오루는 생각보다 많이 취해있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라고 생각하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사실은 내 주위 사람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거지? 사실은 잘 되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서 도와주지도 않고. 매번 잘될 거라는 말만 하잖아. 사실은 내가 이렇게 되는 걸 보는 게 즐거운 거지? 응? 난 가끔씩 치쨩이 이러는 거 정말 싫단 말이야.”
즐거울 리가
“카오루, 제발.”
“치사토?”
없잖아.
“카오루는 진짜 멍청이야.”
너만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너만큼은 그런 말을 안 해주기를 바란다. 이게 얼마나 굉장한 이기심인지 스스로 너무 잘 아는데도 그래주기를, 그래주기를 바란다.
“카오루, 네가 울린 것 같은데.”
“히나. 리사. 어떻게 해야 하지? 음, 저기, 치사토.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뭐 그렇기는 하지만 카오루 지금 전혀 다른 걸 사과해야할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 치사토? 미안. 치사토가 나쁘게 행동한 게 아닌데, 그냥 내가 너무 요새 힘들어서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데, 아니 이것도 변명인데. 그, 저기…….”
너에게 그 누구도 건네주고 싶지 않지만 너의 괴로운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어느 쪽으로도 확답을 주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저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네가 행복한 것도 네가 괴로운 것도 싫은데 이기심 때문에 어떤 방법도 쓰지 못한다. 아니, 쓰지 않는다. 나는 이기적이다. 너의 행복에도 고통에도 내가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나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이 반복되는 고리 안에서 계속 돌면서 괴로워하는 걸 빤히 보면서도. 이제는 당신에게 싫다는 말까지 들어버리고.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좋은 건데. 대체.
“어지러워.”
“응?”
내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지럽고 열이 끝없이 올라온다. 힘이 풀려 감고 있었던 눈을 뜬다. 세 사람 다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 근처에 온다. 카오루의 얼굴이 특히 가까워서 얼굴에 열이 더욱 몰린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어지러워, 카오쨩.”
카오쨩이라고 불렀는데도 신경 쓰지 않으며 내게 많이 어지럽냐고 묻는다. 카오루는 이미 술이 깬 것 같다. 아니, 다른 두 사람도. 오히려 내가 술이 깨지 않는 것 같고. 히나가 집까지 업어야 하나? 라며 물어본다. 리사가 그래도 옆집이니까, 일단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오는 게 낫겠어, 라고 말한다. 카오루의 표정은 더욱 난처한 표정이고,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고 얼굴에 대놓고 쓰여있다. 이젠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어.
“카오루.”
“어, 그, 왜? 물 필요해?”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카오루가 진땀을 흘린다. 아, 못 참겠다. 라는 생각이 든 순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리고 흘러나온다.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키스해 줘.”
“뭐, 뭐? 치사토, 너 지금 취했어! 왜 이상한 술주정을 하는 거야. 히나, 치사토가 예전에도 이런 적 있어?”
“음, 별로 이상한 술주정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지러워서 어깨가 옆으로 기울어지자, 카오루가 황급히 내 어깨를 붙잡는다. 리사와 히나가 일단 옆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말씀드려볼게, 이러다 쓰러지겠어, 라고 말하며 집을 나선다. 이제 집에는 카오루와 나밖에 없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보이면 안 될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다.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하지만 헛소리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카오루,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그건, 저기, 술김에 나온 말이랄까.”
당황하는 얼굴이 귀엽다.
“어지러워.”
“히나랑 리사가 부모님 부르러 갔어. 혹시 물 갖다 줄까? 물이 필요한 거야?”
“키스해주면 나아.”
“에?”
“키스해주면……”
이런 식으로 취한 김에 전부 다 말해버리는 내가 한심해서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다시 펑펑 우는 나를 보며 카오루가 진땀을 흘린다. 카오루의 옷깃을 꽉 붙잡아 내 쪽으로 있는 힘껏 당긴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화장과 눈물이 묻어난다. 옷깃을 붙잡은 채 카오루의 몸에 더 가까워지니까 눈물이 오히려 멈추지를 않는다.
“제발 부탁이야.”
카오루가 키스가? 라고 중얼거린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다. 좀 더 일찍 내 마음을 접고 포기하고 꺾어버리고, 당신의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줄 사람을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당신의 본모습을 남들 앞에서 말하지도 말고 연애에 대한 충고도 해줬어야 했다. 당신이 술을 먹고 힘들어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내 이기심 같은 거 꺾어버렸어야 했다고. 하지만 한 편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걸 꺾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또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제발 포기하게 해주세요.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내 마음은 접을 테니까, 얼마든지 널 도와줄 테니까, 날 싫어하지 마.”
“치사토……”
“날, 제발, 싫어하지 마. 부탁이야. 그건 못 참아.”
네가 날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이 마음을 꺾고 살 테니까,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너무 울었는지 이제는 목에서 꺽꺽대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이돌이자 배우인 사람이 목이 쉬어버리다니 정말 바보 같다. 순간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너무나도 서툰, 쓰다듬는 걸 어색해하면서도 정성껏 쓰다듬는 어린아이처럼 서툰 손길이다. 카오루의 손이 등을 쓰다듬고 있다.
“싫어한다는 말 술김이라고 했잖아. 싫어하지 않아.”
고개를 들어 겨우 카오루의 얼굴을 쳐다보자, 새빨개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술기운이 아니라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빨개진 얼굴. 괜히 나까지 당황시킬 정도로 얼굴은 새빨갛고 식은땀이라도 흐르는지 다른 손으로 연신 이마를 닦고 있다.
“겨우 얼굴을 들었네, 치사토. 정신 차렸으면 네 집으로 가자.”
“카오루……”
“응?”
조금 더 당신에게 욕심을 부려도 좋을까, 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솔직하게. 히나가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 고리를 끊어야 하는 날이 와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가능하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끊고 싶다고 생각한다. 또 이기적이다. 그렇지만 이게 나인걸 어떡해, 라고 생각한 순간 놀랍게도 이 변명이 마음속에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조금 더 욕심 부리자.
“방에 돌아갈래.”
“방? 아, 그래.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
“카오루 방에서 잘래.”
“응, 알겠어. 아니, 뭐?”
“아직 어지러워.”
“저기, 네 방이랑 내 방 별로 멀지 않아. 옆 집 정도의 차이인데… 혹시 못 걷겠어?”
“그런 말이 아냐.”
카오루의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오른다. 눈치 챘다면 당신, 이제 어떻게 할거야.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역시 누군가에게 줄 수 없다고, 이 마음도 꺾을 수 없다고. 어떻게든 당신을 내 걸로 만들고 싶다고, 마음이 흘러넘쳐서 조금만 욕심 부리자, 는 말이 계속 욕심 부리자는 말로 변해간다.
“어지러워, 카오루 방에서 키스해주면 나을 것 같아.”
어떻게 할래, 라고 작게 속삭인다. 아마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지만. 카오루는 계속 말이 없고 욕심 부리는 것도 그만해야 할까 생각하던 즈음 카오루가 나를 들어서 안는다. 휙 하고 들어져서 어지럽지만 공주님 같다고 생각했더니 기분이 좋아진다.
“안 돼, 치사토는 치사토 방에 가서 자도록 해.”
역시 안 되는 건가 싶어서 어쩔 수 없네, 라고 중얼거린다.
“미안, 카오루. 내일부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키스만 해주면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더 욕심 부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네가 많이 어지러운 것 같으니까 걱정 되서 안 되겠는걸. 오늘은 치사토네 집에 가서 자야겠어.”
“에?”
“어지러운 게 다 나았으면 말고.”
말하는 얼굴이 빨갛다. 카오루는 정말로 서툰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크게 웃는다. 왜 웃는 거야, 라며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는다. 역시 나는 당신을 다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이 마음을 꺾을 수 없다.
“좀 더 진한 걸 해주면 나을 것 같은데, 카오루.”
그래도 카오루의 지긋지긋한 고리는 내가 꺾을 수 있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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