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리지드

Tag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8. 4. 28. 00:33 2차창작[팬픽션]/뱅드림

“카오루는 연습 같은 거 잘 안 하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치사토는 어제의 일을 후회했다. 평소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더라도 전혀 하지 않을 말을 해버렸다는 것이,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해버렸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실수는 없었다. 연기도 파스파레도 전부 실수 없이 해냈다. 그렇지만 히나가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나를 쳐다보며 웃기는 했다. 오늘은 다들 집에 일찍 가는 게 어때. 히나가 날 보며 웃은 뒤, 그런 말을 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이른 시간에 집에 가는 건 안 된다, 연습을 하자, 라고 했을 텐데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군다나 생각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그러자, 고 해버렸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내가 정말 싫은 것은 카오루의 집이 내 바로 옆집이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다 만약에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어쩌지.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가능성은 많지. 카오루 집에 가서 뭐 좀 전해주고 오겠니, 카오루가 너한테 이걸 전해주러 왔구나, 뭐 이런 가능성들. 지금은 전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습실을 나와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그 눈에 띄는 보라색 머리가 보이기라도 하면 바로 피할 생각이었다. 날 찾기 전에 어딘가 다른 길로 들어가야지. 그 얼굴을 보게 되면 더 많은 생각이 들 것 같아서 싫었다. 어제 못한 말까지 다 해버릴까 봐 내 자신이 무서웠고, 카오루가 여전히 상냥한 사람이라는 게 무서웠다. 어제 카오루가 내게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웃었다. 그게 날 더 힘들게 했다.

 

*

 

어제 어쩌다 보니,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카오루가 먼저 인사했다. 맞은편에 앉아도 좋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앉으라고 안 했으면, 그리고 맛있는 차에 기분이 좋아져 오늘은 얘기를 들어줄 테니 떠들어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런 후회할 말을 뱉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카오루는 이번 연극제에 주인공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몹시 하고 싶었던 역할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로서 모두의 왕자님에 가까워진다는 말도 잊지 않았고, 아무튼… 그렇게 새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카오루에게 한 후배가 인사를 하러 왔다. 주인공으로 뽑혔다는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고, 빨리 새 연극이 보고 싶다고, 너무 멋지다고, 뭐 그런 얘기들. 나는 그 얘기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네, 카오루의 팬인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오루는 상냥하게 그 아이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때였다.

 

“카오루 선배의 연극 기대하고 있어요! 카오루 선배는 늘 그랬듯이 잘할 테니까요, 연기의 천재잖아요.”

 

그런 말을 한 뒤 인사 하면서 떠났지. 그리고 카오루가 쑥스러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천재라니, 과분하군. 하지만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주인공이 되어 보이겠어.”

 

왜 그 때, 나는 화가 났을까. 그 때, 참지 못하고 후회할 말을 해버린 것이다.

 

“카오루는 연습 같은 거 잘 안 하지?”

 

카오루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는데, 나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이후에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카오루가 나를 보며 웃었다는 것. 웃으면서 ‘글쎄, 연습의 기준이 치사토라면 안 한다고 할 수 있겠네.’ 라고 했다는 것. 나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나와 버렸다. 카오루가 날 불렀던 것도 같은데, 붙잡지는 않았다.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왜 그런 실언을 한 거지, 대체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는데.

 

뭔가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몇 명의 사람들이다. 고개를 드니, 카오루가 속한 밴드의 전원이 서있다. 이름이 분명, 헬로 해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오루를 제외한 멤버들이 카오루에게 인사를 하며 가버린다. 카논마저 다음에 봐, 라고 하며 가버리고 다른 멤버들은 친구랑 집에 같이 가, 라고 한다. 카오루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평소와 다른 게 없는 얼굴이다. 그 점이 나를 화나게 한다.

 

“치사토.”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카오루가 누구보다 노력하는 거 알아, 잠시 딴 생각 하다 그런 말이 나와 버렸어. 요새 감기 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봐.”

 

나는 카오루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준비했던 말을 전부 해버렸다. 이렇게 하면 아무 말도 못하겠지, 사과를 해 버렸으니까. 상냥한 카오루라면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괜찮다고 하겠지. 그리고 같이 집까지 가는 거야. 그리고 집 앞에서 헤어지는 거지. 그거면 됐다. 내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사과하면 되는 건데, 이렇게 하루를 낭비하면서 고민할 이유는 없었던 거다.

 

“치 쨩.”

 

뜻밖의 호칭이 들려와 고개를 든다. 카오루는 평소와 같은 표정이다. 나를 이 호칭으로 불러주는 카오루를 정말로 좋아했는데, 오늘만은 싫다고, 오늘은 안 된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 들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오히려 더 빨리 괜찮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빨리 그렇게 말해. 그렇게 대답해. 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왜 화가 난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내가 화가 났었구나, 라는 깨달음에 놀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나를 카오루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화가 나 보였냐고 물어볼 뻔 했으나 입을 다문다. 입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힌다. 카오루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넌 너무나도 상냥하구나.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어쩌면 다 알고 있어서 물어보지 않는 걸까, 그런 거라면 어쩌지, 내가 어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사실 다 알고 있으면 어쩌지.

 

“카오루,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끝내 못하는 말, 그건 이런 말들이다.

난 네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다고, 그런데 네가 천재인 것도 알고 있다고, 내가 어릴 적부터 너보다 배로 노력했는데도 너처럼 될 수 없었다고, 난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했는데 너는 나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그걸 다 넘어 버렸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천재는 이길 수 없었다고, 가장 소중한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는데도 난 그걸 견딜 수 없다고, 그리고 그렇게 천재인 너를 모두들 천재라고 생각한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냥 왕자님으로만 생각한다고, 그리고 너는 모두에게 상냥해지기 위해 기꺼이 그 왕자님으로 산다고, 난 그게 너무나도 꼴보기 싫다고, 그런 말들을, 나는 아랫입술까지 깨물어가며 참았다. 무슨 말을 해야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화낸 적 없다고 말해야했다. 내가 너에게 화를 냈든, 너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냈든, 그것과 관계없이 화낸 적이 없다고 거짓말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을 열면 말들이 쏟아질까 봐, 모든 말들이 흘러나올까 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카오루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웃고 있다. 짜증날 정도로 환하게. 나는 나도 모르게 제발 그렇게 상냥하게 웃지 말라고 소리를 칠 뻔했다.

 

“일단 집에 갈까?”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루가 내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앞서 걷는 나의 옆에 따라 붇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다음에, 언제든지 다음에, 괜찮다면 그 때는… 말해줄 수 있어?”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걸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다음에라도 듣고 싶네. 치사토는 말을 잘 안 해주니까.”

“카오루.”

“응?”

“사실은……”

 

사실은 다 알고 있어? 그런 말을 하려다 참는다.

 

“난 아무것도 몰라.”

“뭘 모르는데.”

“그냥, 치사토가 나한테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걸. 사실이잖아.”

 

잠시 걷는다. 서로의 집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진다. 헤어지기 전, 카오루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본다. 웃고 있다. 상냥한 사람. 모두에게 상냥하지, 모두에게 열심이지, 그런 네가 싫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집을 향해 들어가 버린다.

 

“다음 연극, 얼마나 잘하는 지 보러갈게. 하나하나 평가해줄 테니까, 저녁약속 비워놔.”

“그래, 알았어.”

 

그 때는 말해줄 수 있겠지. 아마도, 라고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불빛이 환하게 내리쬔다. 신발을 벗는 동안 현관의 등이 꺼진다. 막이 내려간 무대처럼 어둡다. 하하, 하고 작게 웃어버린다. 나는 알 수 있다. 카오루와의 연극이 끝나고 있다.

'2차창작[팬픽션] > 뱅드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요히나] 창고 정리  (0) 2018.06.20
[리사유키] 빛과 설탕  (0) 2018.05.31
[치사카오] 주정뱅이들  (0) 2018.05.18
[모카란] After AfterGlow  (0) 2018.05.03
[토모히마] 낯섦  (0) 2018.04.26
posted by 리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