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부키 사아야는 그랬다. 뭔가를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아니, 늘 뭔가를 원하고는 있었다. 단지 사아야는 뭔가를 원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을 뿐이다. 사아야는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맞췄고, 그 삶이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자신의 이득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남들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썩 피곤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그랬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 언제부턴가 그 말이 사아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아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에 지쳤다.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아야, 도와줄 수 있어?’
이 말 한 마디면 사아야의 모든 것이 움직였다. 사아야는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연주를 하다가도 자주 멈췄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아야를 필요로 한다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아야는 늘 도와줄 수 있었다. 도와줄 수만 있었다.
그 날도 멤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며 사아야는 웃고 있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조금 피곤해 보여서 멤버들이 몇 마디 걱정을 던지기는 했다.
“아냐. 조금 잠을 못 자서.”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다. 사아야는 언제부턴가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집중력을 잃었다. 집안일에 가족 문제, 밴드, 학교, 성적, 인간관계, 같은 사람이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을 사야는 두 배로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느꼈다. 사아야는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집안 구석에 모여 있는 먼지 뭉치 같아.’
구르고 구르다 결국 구석까지 내몰린 먼지 뭉치. 쓸려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아야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아야는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그 날은 하교 후, 버스를 타고가 스튜디오에 도착하기로 했다. 연습이 있었다. 사아야는 연습 후, 빵가게 일을 도와줄 예정이었다. 사실 연습 날도 빵가게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로 옮긴 것이었다. 그런 것마저 스트레스였다. 멤버 모두가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벨을 누르고 뒷문에 모여섰다. 사아야는 맨 뒤에 서 있었다. 옆에는 오타에, 앞에는 나머지 멤버들이 있었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고, 멤버들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사아야는 오타에보다 살짝 앞에 서 있었는데, 내리려다 말고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사아야는 몸에 밴 습관을 버릴 수 없었다. 먼저 내리라는 의미로 사아야는 오타에의 이름을 불렀다.
“오타에.”
오타에는 버스에서 내리는 대신 사아야의 허리에 손을 감고 뒤로 살짝 끌어당겼다. 버스 기사는 그걸 내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대로 출발했다. 사아야가 당황해서 벨을 누르려 하는데, 오타에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오, 오타에? 왜 안 내렸어?”
사아야가 묻기 무섭게 오타에의 전화가 울렸다. 카스미였다. 카스미의 전화를 받은 오타에는 한 마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 카스미. 갑자기 일이 생겼어.”
사아야는 당황했다. 왜 내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버스가 계속 간다면 자신의 집과도 멀어지는 꼴이었다. 계속 가면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 생각하는데 오타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사아야를 쳐다봤다.
“사아야, 저 자리 어때?”
오타에는 사아야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2인석이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창가 자리에 앉힌 뒤, 그 옆에 앉았다. 사아야는 이 쯤 되니 당황을 넘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오타에가 원래 엉뚱한 말을 하고 가끔씩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는 건 알았지만 이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사아야는 하루 일정이 전부 꼬였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오타에,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당장 내려야해. 일단 이 버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내리고 싶었어?”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연습하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당연히 내렸어야지.”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사아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오타에도 사아야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올려다보면서 내 이름 불렀잖아.”
“그게 왜?”
“정말 내리고 싶었어?”
오타에가 사아야를 내려다봤다.
“오타에, 장난은 이쯤 하고 일단 내리자.”
다시 벨을 누르려 사아야가 손을 뻗었다. 오타에가 사아야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힘은 주지 않았지만 벨을 누르지는 못할 정도였다.
“난 사아야가 내리고 싶지 않아서 날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뭐?”
“내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는걸.”
“그게 무슨…”
사아야는 화를 내려다 말고, 숨을 한 번 참았다. 몇 초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버스 안에서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사아야는 계속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참았다. 오타에의 행동과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아야는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는 이 상황이 싫었다. 카스미는 왜 오타에의 말 한 마디만 듣고 다시 전화도 하지 않는 걸까. 그 순간, 사아야는 휴대폰을 꺼냈다. 카스미에게 전화해보자는 생각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이 지연되는 게 아니니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아야.”
오타에가 사아야를 불렀다. 전화를 걸려다 말고, 사아야는 오타에를 올려다봤다. 오타에는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사아야의 손은 여전히 휴대폰을 잡고 있었고,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휴대폰은 놔두고, 버스에서 잠깐 자는 게 어때?”
사아야는 이 쯤 되니 오타에가 생각이 없거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타에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기는 했지만 사람을 화나게 할만한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난이라기에는 집요해 보였다. 집요, 아니, 절실해보였다.
“오타에 원하는 게 있어? 원하는 게 그거야? 그렇지만 나 오늘은 아주 바쁘거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부탁 들어줘.”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부탁 들어주면 도와줄게.”
점점 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아야는 이제 한숨을 쉴 기운조차 없어 그냥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벨을 누르려 하면 오타에가 손을 뻗을 것이다. 사아야는 일단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오타에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무엇을 들어주겠다는 거야, 라고 물으려는데 오타에가 입을 열었다.
“사아야가 내 이름 불렀잖아. 그러니까 도와줄게.”
사아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오타에의 말대로 잠이 오는 것도 같았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눈이 감기려 했고, 사아야는 이러다가는 정말로 부탁을 들어주게 되겠는데 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 안에서 잠들면 큰일인데도 사아야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정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 근래 잠도 자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한순간 화낸 뒤, 긴장이 풀리자 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졸리는 와중에도 사아야는 말을 이어가려 애썼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사아야는 눈이 감기는 순간 오타에가 속삭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아야, 잘 자.”
*
사아야가 눈을 떴을 때는 종점이었다. 버스들이 몇 대 줄지어 선 터미널에서 내린 사아야는 이제 화가 나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잠을 자고 나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오타에는 이제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사아야가 종점까지 잠들 줄은 몰랐는데.”
저녁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사아야는 당황해서 눈을 피하는 오타에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그러기야?”
사아야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을 묻기 위해 안내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 오타에가 사아야의 어깨를 잡았다.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을 때처럼. 사아야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이냐는 듯 오타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사아야는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오타에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사아야를 앉혔다.
“내가 물어보고 올게.”
사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타에가 미안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아야는 잠에서 깨어나 뻑뻑한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눈이 건조하면서도 시렸다.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양 손으로 눌렀다. 몇 분 정도 그러고 난 뒤에야 오타에는 돌아왔다. 오타에의 손에는 따뜻한 캔 음료가 두 개 들려 있었다.
“깨죽?”
“맛있어 보여서.”
깨죽이 캔에 들어있으면 그건 음료일까 아닐까, 오타에는 그런 소리를 하며 따뜻한 캔을 사아야의 볼에 가져다댔다. 사아야는 자신 몫의 음료를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아야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캔을 양 손 안에 가둔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오타에는 옆에서 말없이 깨죽을 마시거나 후후 불어대거나 했다. 오 분 정도였을까, 사야는 그제야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삼십분 뒤에 온대.”
“응?”
“버스 말이야.”
“아, 응.”
“그거 타면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사아야는 적당히 식은 캔의 뚜껑을 땄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고소한 냄새가 캔 안에서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맛있네.”
“그렇지?”
오타에는 깨죽을 절반 이상 마신 상태였다. 사아야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깨죽을 마셨다. 평소라면 삼십분 이라는 시간 동안 시계를 보기도 하며 언제쯤 미리 나가 있어야 좋은지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차를 놓쳐도 다음 차가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빵집에는 내가 연락해뒀어.”
“뭐, 정말? 오타에, 너 생각보다 철저하구나.”
“지금은 칭찬해줘야 하는 타이밍 아냐?”
“하하, 그건 그러네.”
사아야가 웃는 소리가 터미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오타에,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버스에서 안 내린 거야. 아까는 조금 화가 나서 물어봤는데, 지금은 정말 화 안 났으니까.”
오타에가 사아야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 사아야는 잠들기 전 본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비슷하다 생각했다.
“사아야는 걱정이 너무 많아.”
“글쎄, 오타에가 걱정이 없는 게 아닐까.”
사아야는 그 말을 한 뒤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럽다는 의미야.”
“사아야는 내가 왜 걱정이 없는 것 같아?”
“응?”
사아야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을 찾지 못 했다. 말없이 깨죽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거든. 그래서 걱정이 적은 거야.”
“그건 좋은 일이네.”
“사아야.”
“응?”
“사아야가 힘들 때는 누가 도와주는 거야?”
오타에는 다 마신 깨죽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왔다. 사아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오타에를 쳐다봤다.
“사아야가 버스에서 내 이름을 불렀잖아. 도와달라고 하는 줄 알았어. 그것뿐이야.”
몇 십분 뒤에 버스가 도착했다. 사아야와 오타에는 2인석에 앉았다. 이번에도 사아야가 창가 자리, 오타에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사아야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오타에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사아야는 오타에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잠깐 잘 테니까, 이번에는 꼭 제 때 깨워줘.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꼭.”
오타에의 어깨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오타에는 만족했고, 사아야도 그랬다. 버스가 출발하고, 사아야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사아야는 한 가지 말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사아야에게 있어서 부탁이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시간 비워놔. 그 때도 이렇게 도와줘.”
오타에는 대답하는 대신 사아야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좀 전까지 따뜻한 캔을 쥐고 있었던 손은 따뜻했다. 오타에는 사아야를 바라보다 말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얀 색으로 변하면 더 예쁠 것 같았다. 시간은 언제든 비워놓을 수 있지. 오타에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줬다.
“사아야, 좋은 꿈 꿔.”
'2차창작[팬픽션] > 뱅드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오치사] 산타는 노크를 한다 (0) | 2018.12.13 |
---|---|
[타에사야]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진다 (0) | 2018.10.12 |
[카오치사] 잠기는 순간들에 대하여 (0) | 2018.10.02 |
[유키리사] 출발선 (0) | 2018.09.30 |
[모카란] 어느 날 늦은 점심 (0) | 2018.09.24 |